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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7  <그러고보니 이렇게나> 샘플
  2. 2014.12.20  나는 감히 너를 원한다
  3. 2014.09.23  꿈의 끝
  4. 2014.09.06  시들어 지는 꽃
  5. 2014.07.15  이변의 잔흔
  6. 2014.07.12  스테씨 천모델 인터뷰
  7. 2014.06.27  스테C 천모델
  8. 2014.06.02  고록 1
  9. 2014.03.13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10. 2013.11.10  SS2 천란씽 시트




복합 커뮤니티 <중앙수사국 특수재난관리과: SPEDIS>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자캐커플책(BL)입니다.








 별다른 용건 없이, 그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찾아가도 되는 자리에 머무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퇴근하기 전에 얼굴이나 볼까 싶어 랩으로 올라가는데,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누군가의 고함이 되었다. 격양된 어조가 빠르게 쏟아진다 싶더니, 쾅하는 소리를 끝으로 사무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이런 시간대에 사람이 남아있을 만한 곳은 몇 군데 없기에 불길한 생각이 자꾸 스멀스멀 떠올랐다.

 서둘러 복도 끝 모퉁이를 돌자, 설마 하던 루스가 막 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루스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고갯짓으로 인사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 그대로 쿵쾅거리며 란씽을 지나쳤다. 란씽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성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루스는 늘 무언가에 화가 나 있다. 그래서 모니터에 대고 총을 갈기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정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랩에서 나온 루스가 평소보다 더 격분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모쪼록 큰일이 아니면 좋으련만.

 유리문 너머를 힐끗 들여다보니 랩에는 선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늘 무언가를 질겅거리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고개가 떨구어진 바닥엔 서류뭉치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란씽이 랩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돌아선 얼굴이 스르르 녹았다.


 어서 와요. 일은 잘 마무리됐어요?”


 부드럽게 휜 눈에 피로가 비쳤다. 란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사람도 없어.”


 안색을 살피느라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에 선하가 조금 더 기쁜, 혹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종이다발을 내던지는 루스와 지친 듯 시선을 피하는 선하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 루스는 총을 꺼내 겨누기도 했고, 책상을 발로 되게 차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선하는 시위하듯 침묵하는 게 전부다. 상상 속에서나마 맞불 놓지 않는 건 지독히도 선하다웠지만, 정말 그런 식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입안이 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대답해줄 것 같진 않은데. 란씽이 고민하는 사이 선하가 먼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란씽과 시선을 맞추며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미끄러지듯, 선하의 손이 란씽의 목에 감겼다…….


 괜찮아?”


 랩인데. 속뜻을 읽은 선하가 빙긋 웃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제 올 사람도 없는걸.”


 그렇구나, 아무도 없으면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란씽은 한 손으로 선하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일전에 선하가 일러준 지침을 일부 수정했다. 아무도 없는 랩에서 해도 되는 것. 란씽을 가만 들여다보던 선하가 란씽의 손을 잡아끌어 제 허리 위에 올렸다.


 아니면, 서고로 갈까요?”


 나긋한 속삭임이 아주 가까이서 들려온다. 소리와 함께 뱉어진 숨이 턱 끝을 간질였다. 란씽은 대답 대신 선하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벗겼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가 지나고, 한쪽 다리가 접힌 안경이 선하의 랩 가운 주머니 안으로 떨어졌다.


*

샘플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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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었던거 같은 기억이 나니까 접음

근데 별로 안 길면 창피해서 어떡하지(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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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겨우 남아있는 기억조차 얼룩덜룩하게 빛바란 그림처럼 불완전했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다정했다고, 늘 링거 따위를 맞고있던 손등은 뼈밖에 남지 않아 앙상했다고. 품에 안기면 마른 햇빛 냄새가 났고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고. 머리를 쓸어내리고 뺨을 만지던 따스한 손가락, 어설프게나마 바늘을 잡고 만든 것에 과분할만큼 떨어지던 칭찬.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와 좋은 체격같이 작고 사소한 것 마저 자랑스러워 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 만큼 겹겹이 덧칠하고 기운 기억 속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던 강인함이라거나, 눈을 둥글게 휘며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어머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목구비 생김새 만큼은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망쳐놓은 그림처럼 뭉개진 채로 남은 것이다.

 또 언젠가는 한참동안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며 좋아라 말한 적이 있다. 입술을 다물고 있을때 둥글게 지는 언덕모양 호선마저 똑같다고 즐거이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단언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이런 표정을 한 적은 없었다는 점 뿐이다. 단 한 번도.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먼 발치에 누군가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저 사람을 어머니라고 여겨도 좋은 걸까. 그렇다면 어머니같은 누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피니 무언가를 말하듯 오물거리고 있었다. 하도 먼 거리여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어쩐지 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샤오란, 샤오란, 하고. 이상하다. 란씽은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질척한 모래톱에 파묻힌 듯 사지가 묵직했다. 그래도 이를 악 물고 팔다리를 힘껏 당기며 한발짝씩 나아갔다. 땅을 박찬 발이 다시 바닥을 밟기까지 무던히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 초조한 마음에 아무리 고함쳐도 소리는 목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는다.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낯선 표정이 혀뿌리를 바짝바짝 타게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질책하는 듯, 슬픈 듯,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몸부림 끝에 간신히 손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다랐다. 여전히 어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고, 이만큼 가까이 왔음에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란씽은 어머니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작고 둥근 어깨에 손끝이 스침과 동시에 닿은 곳이 검게 바스라졌다. 그것을 방아쇠로 어머니는 조각조각 흩어졌고, 그 잔해가 란씽을 덮쳤다. 란씽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활활 타오르는 고향집이었다. 불길은 집 전체를 집어 삼키고도 모자라 란씽을 향해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란씽은 망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이제 남은 가구, 물건 하나 없는 빈 집이었으나 불타 없어져도 좋을 곳은 아니었다. 어서 불을 꺼야한다는 생각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머뭇거리는새 란씽은 제 키만한 불길에 둘러쌓여있었다. 여전히 사지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말을 듣지 않았고, 뻘건 불길 너머로 지붕 끝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온 화기보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대로 불에 타죽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무력감이 온 몸을 지배했다. 이런 와중에도 왜인지,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란씽, 하고.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완전히 화염에 삼켜지고 나서야 착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따스한 온기, 익숙한 체취였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누군가에게.






 "선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숨소리에 가까운 이름이었다. 선하가 허리를 숙이자 침대 시트가 부스럭거렸다. 란씽은 선하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고 선하는 식은땀이 흥건한 란씽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코 끝, 눈꺼풀, 뺨, 귀, 차례로 선하의 온기에 누그러졌다. 란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맞닿은 살갖으로 선하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하고. 벌컥거리는 제것과 달리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소리였다. 란씽은 선하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쿵, 쿵, 쿵. 그러면 말로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을 용케도 알아들어, 선하는 란씽의 머리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속삭인 소리에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다.



***


내남자가 내새끼 달래주는거 보고싶엇ㅅ더 내남자는 최고야

누구랑 같이 자본 기억이 없어서 저런 꿈 꿨을 때 누가 달래준 것도 처음이지 않을까 한다 천란씽이 우는 애였으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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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끝 :: 2014. 9. 23. 23:37 SPEDIS



꽃1피는1병으로 내남자를 앓는 천란씽이

마저 다 쓰고 백업하려구 했지만...일단...일단 백업할거야(쓸쓸


슾앤솔에 참가

그냥 올려두긴 심심하니까 샘플 분량이라도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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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 지는 꽃 :: 2014. 9. 6. 02:56 SPEDIS





 평소보다 어두운 아침이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고, 한낮이 되도록 도시는 재색 물안개로 흐렸다. 정오를 지나자 안개가 차츰 걷혀, 란씽이 막 파견 근무를 끝내고 수사국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하늘도 완전히 갠 뒤였다.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오늘의 날씨와 사건사고에 대해 말했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가시거리가 채 백 미터에 못 미칠 만큼 안개가 짙었고, 그만큼 사고도 사상자도 많은 이변적인 하루였다고. 

 란씽도 조금쯤 그런 하루였다.



 [선하, 저녁은?]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직이에요. 당신은?]

 [가고 있어. 같이 먹어.]

 [응. 도착하면 얘기해요.] 



 선하는 메세지 답장이 빠른 편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다. 오늘은 신호에 걸리는 사이사이 메세지를 보냈는데, 플립을 닫아 옆좌석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렸다. 도착하면 얘기하라는 메세지를 확인했을 땐 이미 수사국 주차장 안이었다. 주차장이야, 자판을 누르며 란씽은 선하가 일하는 틈틈이 제게 메세지를 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그럼 그걸로 좋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곧 내려간다는 답장이 왔다.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선하가 내려왔다. 다른 때 보다 잠이 부족한 날이었고, 낮동안 쌓인 피로로 조금쯤 기운 없어보이는 걸 빼면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야. 무심코 말했더니 선하는 그저 웃고 만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고, 란씽은 현장에서 가져온 채집통을 보여줬다. 알록달록한 나비 여러 마리로, 유사이변이 의심되는 사건의 증거품이었다. 통 안을 들여다보는 선하의 표정이 부드럽다. 빨간색, 보라색, 검은색, 하늘색…….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어갈까요?"

 "응."



*



 란씽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자주 먹어서 익숙한 음식과 먹어보지 못해서 낯선 음식만이 있다. 요즘은 익숙한 음식 중에서도 간이 강한 음식을 고른다. 의식한 것은 아니고, 그것도 기억력 좋은 선하가 요즘은 그것만 먹네요, 하고 지적해줘서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평소에 거의 먹지 않던 만두탕을 골랐다. 란씽은 한 손으로 채집통과 수저를, 다른 한 손으로 만두탕을 들고 선하를 기다렸다. 접시 가득 샐러드를 담아온 선하가 란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지 그랬어요. 들고 있는 것도 많은데……."  



 말끝을 흐리는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란씽은 선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만두탕 그릇을 든 제 손이 있다. 만두가 먹고 싶은 걸까? 하지만 이런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란씽이 뒤늦게 눈치챘을 때, 선하는 어서 앉자고 말하며 앞서 걷고 있었다.



 "안 뜨거워. 괜찮아."

 "응, 알아요. 어서 와요. 국 다 식겠어."



 얼른 선하의 맞은 편에 앉으며 안색을 살피니,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는 선하가 웃는다. 예의 선한 미소로. 란씽은 이제, 그 표정을 안다. 그래서 뭐든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는 모른다. 괜찮다는 말보다 나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쉽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 이상 필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란씽은 생각했다.



 "란씽?"



 재촉을 받고, 마지못해 국을 뜨면서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



 증거물은 자기가 들고 올라갈 테니 이만 들어가 보라고, 선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란씽은 기어코 채집통을 건네주지 않았다. 승강기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침묵은 랩까지 이어졌다. 저녁 시간이었고, 랩 요원들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자리에 없었다. 채집통을 책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란씽의 일은 끝났다. 선하가 이제 들어갈 거냐고 물었고, 란씽은 고개만 내저었다. 대신 잠시 머뭇거리다 선하의 앞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식당 안에서 뜨거운 그릇을 들고 있었던 손이다. 선하는 말이 없었다. 란씽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조심해. 안 다치게."



 어렵사리 말하니, 선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두 손이 란씽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 쓸어내리고 어루만진다. 꾹 눌러보기도 한다. 마침내 빈틈없이 손가락끼리 꼭 얽은 선하가 란씽과 눈을 맞췄다. 



  "그런 생각을 해요. 가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건 어떤 느낌일까, 하고."



 바보 같죠, 그렇게 덧붙이는 선하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오히려 말문이 막혀, 란씽은 그냥 선하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귓가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간질거렸다.



*



 이변에게 초인종을 누르거나 미리 노크하는 정도의 친절함과 예의가 있다면, 아마 그중 하나는 선하의 몫일 것이다.

 소리는 불규칙했고, 선하는 그 알량한 노크가 들릴 때마다 괴로워했다. 어쩌면 매일, 어쩌면 격일로. 운이 좋으면 일주일 내내 잠잠할 때도 있었다. 간격이야 어찌 됐든 선하는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진 않았다. 란씽이 무작정 자료 서고 문을 부순 뒤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고, 이변적인 날씨도 몇 번은 더 있었으나, 선하가 먼저 란씽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혼자서 견뎌온 밤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란씽은 이해하고 있다. 다만 란씽 역시 오래간 선하를 지켜봐 왔고 그런 날의 선하는 평소와는 조금쯤 달랐기 때문에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서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었다. 선하의 허락을 구해 해가 뜨도록 그의 옆에 있었던. 손을 잡고, 뺨을 맞대고,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동이 틀 즈음, 선하는 란씽의 품 안에 잠이 들었다. 란씽은 땀으로 달라붙은 선하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빨갛게 짓무른 눈가를, 이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란씽으로선 무엇이 선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모른다.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종류다. 그 몫을 제가 대신 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 한들 선하가 원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이유는, 란씽 역시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란씽은 땀에 젖은 선하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블라인드 커튼 끝에 햇빛이 맺혔다. 






***

급 자료서고 찾아가는 로그랑 이어지는 느낌적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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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의 잔흔 :: 2014. 7. 15. 00:30 SPEDIS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고, 또 이상하지 않은 세계. 그 곳을 벗어나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서툰 청년은 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천 모델)은 인터뷰 시간보다 한참 일찍 카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기자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다가 테이블을 노크한 뒤에야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고 웃었다. 웃는 얼굴이 낯설다고 말하니 사실 저도 그래요, 하고 넉살 놓게 맞장구를 친다. 카메라가 돌아간 동안에는 웃어본 적이 손에 꼽는다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고 평소에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다고. 는 천 란씽에게도 (천 모델)에게도 기나긴 여정이었던 것 같다.




 - 첫 드라마가 무사히 끝났다. 소감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시원섭섭하다. 



 - 그게 끝?

 정말 어떻게 다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웃음) 연기자로서 얻은 성취감도 있고, 팬으로서도 많이 좋아했던 드라마가 끝나서 아쉽기도 하고……. 본업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주로 많이 든다. 하여튼 복잡하다(웃음) 



 - 드라마 는 어떤 작품이었나?

 매주 TV 앞에서 시청자의 마음으로 한 시간을 보냈다. 나름 모니터링한다고 본 건데, 정신 차리면 드라마가 끝나있더라(웃음) 그래서 그냥 즐기며 봤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정말 재밌었다. 팬으로서는 그렇고, 연기자로서는 내 세계를 넓혀준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이쪽에 종사하는 한 이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될 거 같다. 



 - 한 마디로 인생 작품이라는 뜻인가?

 요즘 말로는 그렇다(웃음)



 - 본인의 배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다.

 글쎄, 지켜봐 주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정이 간다. 천란씽은 작가님께서 내 화보 사진을 보고 구상한 캐릭터라고 한다. 날 캐스팅한 것도 작가님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청자인 나는 란씽을 가족이나 형처럼 느낀 거 같다. 물론 좀 답답하기도 했고(웃음) 걔는 너무 말을 안 한다. 하여튼 영화 같은데 많이 나오는 전형적인 힘 세고 과묵한 캐릭터 같다. 평소에는 공기처럼 화면에만 잡히다가 필요한 순간에 활약하는?



 - 그러고 보니 스턴트맨 없이 액션씬을 소화해 화제가 됐는데.

 평소에도 몸 관리 겸 운동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다. 무술도 여러종류 배워본 적 있고. 캐스팅되고 난 뒤로는 팔극권이랑 벽괘장도 배웠다. 어렵지만 재밌었다. 액션씬 찍을 때는 무술 감독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큰 어려움은 없었던 거 같다. 사실 편집이 잘 돼서 그렇지, 나는 별로 한 게 없다. 나보다 다른 스턴트맨들이 많이 수고하셨지.



 - 드라마를 찍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 모델로서는 대중 인지도가 낮은 편이거든. 옛날부터 쭉 아껴주시는 팬들만 계셨는데, 요즘은 집 앞 편의점도 그냥 못 간다. 본업 쪽 일을 할때도 다른 분들이 드라마 얘기를 많이 해주신다. 매니저 형 말로는 팬카페 회원 수가 몇 배로 늘었다고 한다. TV 라는게 굉장하다 싶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 팬이라고 하니, (천 모델) 씨 팬덤 소문이 대단하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은 분들이다. 말했지만 오래전부터 나를 무척 아껴주신 분들이다. 데뷔 때부터 쭉 좋아해 주신 분들도 계신다. 팬카페 등지에서 직접 활동하진 않지만, 매니저 형을 통해 종종 그분들 얘기 듣곤 한다. 늘 힘이 된다. 



 - 이번이 첫 연기 도전이었던 만큼 많이 고생했을 텐데. 실제로는 어땠나?

 당연히 어려웠다. 모델 생활하면서 연기 쪽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이런 기회로 하게 될 줄은 몰랐고, 여러모로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가장 어려웠던 건 대사나 사소한 몸짓으로도 감정을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극 중 란씽의 대사가 적고 어눌한 편이어서 그런 면에서는 커버가 된 거 같고(웃음) 란씽은 나랑 닮은 점도 많고 이입하기도 좋은 캐릭터여서 생각보다는 빨리 익숙해진 거 같다. 선배님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다들 내 부족한 점을 많이 도와주시고 채워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리고 싶다.



 - 동료 연기자들이랑 사이가 좋은 모양이다. 가장 친한 동료 연기자는?

  필드 요원들(웃음)이랑은 두루두루 친하다. 지난 시즌부터 쭉 같이 연기해온 선배님들하고도 친한 편이다. (로테스트)선배나 (밴더위트)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랩의 (강) 선배, (막스) 선배도. 제일 친한 사람은 (이스트클리프) 선배님이랑 (채) 형일까. (이스트클리프) 선배하고는 같은 그룹이었던 적이 많았고, (채) 형은 일대일 씬이 종종 있었다. 



 - (채 배우) 씨면 빼놓을 수 없는 화제가 있다. 

 아, 역시. 각오하고 있었다(웃음) 



 - 각오가 돼 있다니 질문을 드려야지. 특별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나?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땐 깜짝 놀랐다. 그럴 줄은 전혀 몰라서……. 내가 생각하고 연기한 천 란씽이란 캐릭터와 달랐다고 해야 하나, 송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둘이 그냥 친한 술친구인 줄 알았다. 정말로. 내가 이런 말 하면 안되는 건 알지만……, 둘 사이에 복선이나 감정선이 있긴 했는지 의아했다. 물론 그때는 그랬다는 뜻이다. 혼자 난리 나서 매니저형이랑 상대역인 (채) 형 붙잡고 한참 횡설수설하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두 분께 부끄럽고 죄송하다. 말하고 나니 특별한 에피소드는 아닌걸(웃음)



 - (채) 씨는 러브라인에 대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던데.

 들었다. 형이랑 대화하고 나니 이해가 되더라. 근데 그건 선하가 란씽을 생각하는 감정이었고, 내가 연기하는 건 반대 방향이니까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 그 뒤로도 혼자서 많이 고민했다. 촬영 직전까지 영 감이 안 잡혀서 쩔쩔맸는데, 정신 차려보니 마지막 씬에서는 나 스스로 란씽의 감정에 납득 하면서 연기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니까 몰입하기도 쉬웠다. 생각해보니 아주 복선이 없지도 않았고, 뭣보다 (채) 형이 잘 이끌어줘서 가능했던 거 같다.



 -복선이라면?

 가끔 대본에 테이블 끝을 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식으로 세세하게 지정해줄때가 있다. 그럴 때 그쪽을 보면 항상 선하가 있었다. 이번 시즌 들어서는 매화마다 그런 장면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던 거 같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가서야 그게 그거였구나 싶더라.



 - 아까 팬덤 얘기를 했는데, 그 커플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 그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아. 요즘 그런 게 트랜드라는 말은 들었다. 그 두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껴주시는 팬들이 계신다면 나로선 그저 감사하다. 연기자로서 캐릭터가 사랑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않나.



 -본인 연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기랑 잘 맞는 것 같나?

 이건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닌데(웃음) 천란씽이라는 캐릭터가 특수한 편이라 뭐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얘는 처음부터 나랑 맞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으니까. 다음에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본다면 그때는 알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연기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다는 뜻인지? 있다면 욕심나는 연기나 역할도.

 연기는 아직 고려중이다. 만약 계속 하게 된다고 해도 바로 다음 작품을 맡진 않을 거다. 나는 란씽처럼 철인이 아니니거든(웃음) 천란씽이랑 정 반대 역할은 해보고 싶다. 어려워도 할 맛 날 거 같다. 연기라는 건 나를 벗어던지는 거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보고 싶다. 역할은, 글쎄. 모델만 아니면 아무래도 좋지(웃음) 



 -마지막으로 차기작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는?

 액션! 맨손 격투씬이 많은 액션 영화가 좋겠다. 때도 안무짜듯 동작 맞춰서 액션 연습하는 게 정말 재밌었다. 합이 딱딱 맞아들어갈 때의 쾌감, 이건 아는 사람만 안다. 정말로.



 - 정말 액션 연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맞다(웃음) 스턴트맨을 했어도 잘 했을 거다.






***

쓸때는 몰랐는데 뭔가 어중간한걸... 인터뷰기사 보면서 썼는데도 이렇다 도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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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씨 천모델 인터뷰 :: 2014. 7. 12. 13:30 AU







 '천 란씽'으로 산 지 어언 2년가량 지났다. 출연 제의를 받고 고심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시즌 종영이 머지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바로 어제 일 처럼 생생한 것도, 꿈같이 멀게만 느껴지는 일도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모두 추억이 될 기억이다.

 대본을 받고 한참 동안 들춰볼 생각을 못 했다. 매니저 형이 뭐하냐고 재촉해도 잠시만요, 하고 어물거렸다. 마냥 즐거운 길은 아니었으나, 막상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저 아쉽다. 촬영장에서 그는 5년 차 시니어 천 란씽이었으나,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SPEDIS>의 수많은 팬 중 한 명일 뿐이다. 누구보다 다음 화를 기다리기 때문에 처음으로 대본을 여는 지금 이 순간이 그렇게 행복하면서도 긴장되는 것일터다.

 결국 매니저 형의 등쌀에 못 이겨 대본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기기 어려웠던 게 거짓말처럼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렸다. 

 아니, 읽어내리려 했다. 




 "……형, 얘네 친구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이래요?"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물으며 짚은 부분은, '천 란씽' 이 '채 선하'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




천모델


1) 20대 후반, 모델.

2) 모델 경력 7~8년. 광고나 MV에는 종종 출연했으나 연기자로서는 <SPEDIS>가 데뷔작. 대중적인 인지도는 썩 높지 않고 팬덤이 다소 코어한 편. 

3) 대사가 워낙 적어 연기력 검증은 아직. 평소 배우 본인과 캐릭터가 닮은 점이 많아 연기가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연기력보다는 배우 특유의 눈빛이나 표정에서 오는 독특한 분위기를 높게 평가 받고 있다. 

4) 몸 관리 겸 평소에도 운동을 즐겨하는 편이다. 스턴트 없이 액션 연기를 소화한 것이 소소한 화제가 됐다. 

5) 종영 이후 연기 활동은 고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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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C 천모델 :: 2014. 6. 27. 21:22 AU




1.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난날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원인불명의 뇌사였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며, 거듭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란씽은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늘 어딘가 아팠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은 날도 침대맡에서 뜨개질하거나 수를 놓는 것이 고작인 체력이었다. 그 깨지기 쉬운 여린 몸이 살기엔 많은 약과 치료가 필요했다. 작은 문파 관장이 감당하기엔 턱없이 큰 구멍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긴 시간 병원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한 채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까지.

 이번엔 제 차례였다. 란씽은 묵묵히 밑 빠진 독에 돈을 길어 넣었다. 

 스물 남짓,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리라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다행히 란씽은 남다른 몸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수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열량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을 모두 쏟아도 하루씩 숨을 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얕은 목숨을 붙잡아 놓던 것은 최첨단 의료기술도, 의사의 진단도 간호사의 보살핌도 아닌, 손바닥만 한 산소 호흡기였다.

 뇌사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기까지 사 년이 걸렸다. 란씽은 제 손으로 호흡기를 떼었다. 남은 것은 페널티로 병든 몸뚱이 뿐이었다.

 호흡기를 떼던 그 날, 한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들었던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사라지기는커녕 끊임없이 새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죄책감이었다. 그만큼 숨 쉬듯 익숙한 감정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잠시를 넘기면 어떻게든 다시 괜찮아졌다. 

 ……지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란씽은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내부를 쓱 훑었다. 그리고 저편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을 불렀다.

 





2. 


 특수능력이 몸 깊숙이 스며들어 변한 것이 몇 있다. 시력이 좋아지고, 체력이 늘고, 정교한 작업이 능숙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리고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게 된 것 정도.




 "안주가 좀 남았네요."




 란씽은 그제야 안주보다 술이 많았다고 눈치챘다.




 "술을 더 시켜야 하나?"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은 그만큼 썩 멀쩡해 보였다. 하긴 자기 관리에 능한 선하가 어디까지 술이 차는 줄도 모르고 막 들이키지는 않았을 거다.




 "있잖아요, 란씽. 전……. 히어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저였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에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안에 담은 것을 꺼내는 얼굴에 취기가 묻어났다. 선하는 조금, 어쩌면 많이 지쳐 보였다.


 토미가 그렇게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는 만화나 게임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굳이 따진다면, 어떻게든 이변으로부터 하늘을 지탱하는 특수관리과가 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깎아가며 지켜야 하는 자리였다. 부서의 모든 요원이, 한때 함께했던 동료들 역시 그렇게 하루하루 일했다. 

 란씽은 늘 그 단어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이름을 가지기엔 그간 걸어온 길이 올곧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속죄나 간신히 하며 사는 처지다. 영웅이 가져야 할 자격이, 제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선하의 가슴을 이보다 더 무겁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너 역시 히어로라는 말도, 선하에게는 쓸모없다는 것을 안다. 

 대신 바닥을 드러낸 잔에 술을 권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으나,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로 한동안은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한가한가 싶으면 날씨가 궂었고, 모처럼 하늘이 개면 일이 밀어닥쳤다.

 휴가계를 수리하러 잠시 수사국에 들렀던 어느 날, 란씽은 지나가던 길에 잠시 닫힌 서고 앞에 멈췄다. 한 번도 문고리를 잡아 돌린 적은 없으나, 잠겨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썩 도움되는 것은 없었다. 대신, 그렇다고 정말 안 올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 떨 바텐더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니 조금쯤 괜찮아진다. 기억해둬야겠다. 우스갯소리로 괜찮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늘 그랬듯,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발소리를 죽인 보람도 없이 먼 하늘에서 우레가 연달아 울었다.





3.


 부쩍 지독한 꿈을 자주 꾼다. 페널티가 악몽으로 변한 게 아닐까, 갈비뼈 아래서 요동치는 통증만 없었다면 제법 그럴싸한 가설이다. 란씽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의식이 들었을 즈음부터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눈가를 간질이는 통에 영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지 못한 건 오랜만이다. 하루쯤은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하루쯤은, 같은 변명이 얼마나 몸을 나태하게 하는 지 안다. 시계를 확인하니 생각만큼 늦진 않았다. 다섯 시를 조금 넘겨, 아직 해가 뜰 리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변이겠거니 여기며 창밖을 보았을 때, 란씽은 그제야 창문 밖의 그것이 햇빛이 아님을 깨달았다.



 특수재난관리과 5년 차, 슬슬 이변이 해결해야 할 사건으로 더 익숙한 시기였다. 그 말은 즉, 모든 이변을 해결할 자신감은 없더라도 웬만한 것으론 새삼스레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의 기상 이변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계절에 맞지 않는 것이 내린다거나, 밤에 해가 뜨고 낮에 달이 뜨는 정도가 아니었다. 세계의 끝, 란씽의 감상은 그랬다.


 새파란 하늘 가득 녹색으로 빛나는 것이 차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름 같다가도,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처럼 흔들리고, 또 꿈틀거리는 뱀처럼 뒤틀렸다. 그렇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떠밀리며 모습을 바꾼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느낀 것은 경이 따위가 아니었다. 갈수록 많은 것에 무감각해지는 란씽으로선 꽤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기도 했다.

 란씽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말아쥔 주먹 위로 심장이 벌컥거렸다.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숨을 꾹 참고 견디면 대개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로 수그러든다. 늘상 있는 일이고 그만큼 익숙하다, 그러니까…….

 아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눈앞에 닥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다.

 란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4.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좁디좁은 인맥 중에도 란씽의 페널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프로페서 닉, 윌리엄, 루시나 가까운 시니어 몇 명, 어떻게 알아냈는진 몰라도 줄리엣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물론 그녀에게 말한 적은 없다. 애초에 자처해 안에 든 것을 토로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대상이 그 여자라면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줄리엣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란씽이 일하는 곳, 취미, 교우 관계, 자주 가는 술집이나 식당같이 시시콜콜한 것부터 제가 보내는 녹색 보석들이 란씽에겐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생각 역시 그랬다.




 "자긴 그걸로 괜찮아?"




 그녀, 줄리엣은 어느 날부턴가 뻔뻔할 만큼 빈번히 란씽의 집으로 찾아왔다. 란씽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제집처럼 빈둥거릴 때도, 다녀간 흔적만 남길 때도 있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와서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있다. 확실히 좀처럼 사람을 들이지 않는 현직 수사관의 집이란 도둑이 숨기엔 알맞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 날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그 일이 그렇게 좋아? 죽어가면서도 못 그만둘 만큼? 아니잖아."




 란씽을 올려다보는 녹빛 눈동자가 사뭇 진지했다. 란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변에 너무 익숙해져서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내일 당장 산소가 없어진다거나,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거 같아?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해? 하늘이? 땅이? 신이? ……아니야, 천란씽씨. 이런 세상에 그렇게 꾹꾹 참으면서 살면 누가 알아주냐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미련하게. 자긴 지금 당장 죽어도 미련하게 참았던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궤변이다. 

 저 길거리의 많은 비관론자가 그러듯, 사이비 종교 교주가 부르짖듯 우리의 세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끝장난다느니,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니 말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말하는 세계의 끝이 당장 내일인지, 혹은 십 년후, 이십 년 후가 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건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듯, 불투명한 미래를 들여다볼 수도 없는 일이다. 

 감정이란 것은 판단을 기대기엔 무척이나 애매하다. 정의하기 어렵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다스리지 못한 감정은 폭력적으로 이성을 좀 먹는다. 순간의 감정을 따라서 좋았던 일은 결코 없었다. 치솟는 분노를 감당 못해 일을 낸 적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나서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 결심했다. 란씽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감정에 겨워 휘둘리는 사람 역시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면한 것에 눈 돌릴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 때문이기도, 갈수록 느끼는 감정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가르침 역시 한몫했다. 참고 견뎌라, 행하는 것은 확신이 선 다음이다. 몸으로 배운 것이니만큼 쉬이 잊어버리지 않고 따르며 살았다 자신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 모든 걸 허물만큼, 란씽은 나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호히 대답했다.




 "안 해."





5.


 ……그랬을 텐데.

 이토록 충실하리만치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도 오랜만이다. 땀방울이 맺히도록 달린 것 또한. 굳게 잠긴 문 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정상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보기 드문 기상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제가 보지 못한 종류였을 뿐. 실제로 하늘 위로 번쩍거리는 것은 단지 그뿐, 지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렇게 호들갑 떨며 달려올 일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괜히 머쓱해 어찌할 줄 몰라, 뜨끈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신 차렸으면 그걸로 됐다. 이제 아무 일 없는 척 돌아가면 그만이다. 늘 그랬듯 체력 단련실에서 수련하고, 아침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면 된다. 란씽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다리가 무겁기만 한지. 벌컥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마치 저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이런 종류의 충동을, 제 안의 소리를 얼마든지 흘려내며 살아왔다. 지금도 못할 건 없다.

 내키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다시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이.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있다. 란씽의 죄책감이, 특수 능력의 페널티가 그렇다. 잠긴 문 앞에 란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아닌 척 그곳을 떠나는 일뿐이었다. 도울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그가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첩장을 받고 나서야, 란씽은 선하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적인 종류의 일까지 관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려던 선하가 외출하는 걸 별일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선약이 있다던 그때 넌지시 물었다면 좋았을까? 란씽은 불쾌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오래도 가졌으나 모르는 척 눈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찌 됐건 결혼하는 동료에게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견뎌야 할 죄책감이 하나 더, 목 아래를 묵직이 짓눌렀다. 

 이후로 썩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혼 소식을 들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괴롭힌 모든 괴로운 것이 그러했듯, 모르는 척 숨죽여 견디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 느낀 불쾌함은 조금도 엷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한 번도 그 존재감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막 일어났을 때, 이변을 목도한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단 하나를. 이번만큼은 감정에 휩쓸려도 좋았다. 

 결심이 섰다면 움직일 뿐이다. 란씽은 눈을 떴다. 문고리를 가볍게 돌려 당기자 반대편 손잡이까지 한꺼번에 뜯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영원히 닫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료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6.


 자료 서고 안은 생각보다 어둡고 조용했다. 케케묵은 먼지와 숨죽인 정적, 블라인드 커튼 너머로 이따금 새어드는 빛만이 있었다. 잠시 바닥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지켜보던 란씽이 걸음을 옮겼다. 일정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책장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다. 

 높은 책장을 몇 개나 지나친 자료 서고의 끝, 가장 깊은 구석에 익숙한 뒷모습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책이나 서류 따위가 뒤죽박죽 흩어져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 요란한 소리는 이것이었을까. 란씽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선하."




 그리고 불렀다.

 안으로 옹송그린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갑……, 자기 무슨 일이에요?"




 오랜 침묵을 깨고, 이윽고 선하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란씽을 등진 채였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미리 연락 줬음 좋았을 텐데. ……참 그렇지, 휴대폰을 꺼놓은 거 같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아, 지금 몇 시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 이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있어요."




 푹 잠긴 목으로 횡설수설하는 한편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분주히 긁어모았다. 숙인 고개 아래 표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이 닿지 않았던 곳을 억지로 짓밟고 들어온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만큼은 잠시 모른 척 눈 감기로 했다.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사방을 더듬던 두 팔이 멎었다. 또 한 발짝, 이번엔 열 손가락이 뻣뻣하게 오므라졌다. 한 발짝, 잔뜩 힘 준 손이 파르르 떨린다. 마지막 한 발짝 정도의 간격을 둔 뒤에야 멈췄다. 둥글게 굽은 등은 한 눈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보였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야." 




 란씽은 그 등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다치게 한 적 있어. 영영 못걷게 만든 적도 있어. 아버지를 죽게 두었어. 내 페널티는 그 속죄야. 내가 견뎌야 해."




 마침내 선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날, 조금이나마 속내를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란씽은 짓무른 눈가를 닦아주기보다 그 앞에 무릎 굽혀 시선을 맞추길 택했다. 




 "이건 선하 몫. 알아. 그래도 당연한 건 아니야. 그래서 곁에 있고 싶었어. 계속."




 시작은 확실하지 않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묻어야 했다. 선한 얼굴, 모나지 않은 성격, 좋은 머리와 깊은 지식, 뼈가 도드라진 발목, 뭐든 질겅거리는 아이 같은 버릇, 가끔 짓는 조마조마한 표정, 그 어떤 점에 이끌렸는지조차 란씽은 모른다.




 "선하."




 다만 확실한 것은 미련하게도 돌아서 온 마음이었다.




 "좋아해."






***

다시 읽기가 두렵다 눈이 고통받는다 도륵 도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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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록 :: 2014. 6. 2. 02:30 SPEDIS




 요사이 블루 던 시티와 인연이 깊다. 예의 91번 버스부터. 란씽은 자동차 열쇠를 챙기며 생각했다. 당시 추적하던 버스에 대해서 큰 수확은 없었으나, 파랗게 색이 변한 우체통을 새로 칠하는 사람들이라면 얼핏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별일이었던 모양이다. 

 블루 던 시티까지는 란씽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애셀에게 같이 갈 거냐고 물었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괜찮다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요전에 겪었던 현장이 요란했던 탓일까. 다행히 누가 다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인트라넷을 타고 오간 얘기를 몇 개 주워듣자면 소란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확실히, 꼭 현장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랩에서 지원해주는 편이 나을 지 모른다. 란씽 역시 랩 요원이 현장에 직접 나가는 데에는 부정적이다. 왜냐면 그때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휴가 내셨었죠?"



 란씽은 옆에서 들린 토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걱정을 담은 눈빛에 란씽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몸이 좀."

 "어쩐지. 저, 선배가 휴가 쓰신 거 처음 봐서 내심 걱정했었어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응. 고마워." 

 "참, 운전은 제가 할까요? 저 길도 잘 아는데."



 란씽은 고개만 회회 젓다 뒤늦게 나중에 피곤하면, 하고 덧붙였다. 때마침 루시에게 보고를 마친 리안이 로비로 내려왔다.

 세 사람을 태운 차가 느릿하게 사무국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블루 던 시티까지는 제법 걸리니까, 그동안 사건에 대해 정리라도 해볼까요?"



 그러자 통신기 너머의 애셀이 대단한 건 없어, 하고 말 문을 열었다.



 -"처음엔 단순한 이변으로 생각하고 리페인팅하고 넘어갔던 모양인데. 그다음 주 금요일에 또 변했대. 그다음 주 금요일에도."

 "갑자기 늘었네요."

 -"갈수록 변하는 우체통 숫자가 늘었다나 봐. 지난 금요일엔 서른 개 이상 발견됐다네, ……요. 최초 발견 지역은……무슨 도서관 앞인 거 같은데. 지도 앱으로 위치 정보 보낼게."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한 토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운전석 쪽으로 화면을 쭉 내밀며 란씽에게도 보여준다. 란씽이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리안에게 말했다.



 "여긴 시립 도서관 앞이에요. 블루 던 시티에서 가장 큰 곳이라, 사람들도 엄청 많이 다녀요."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이란 말이군요."

 -"다른 우체통 위치도 찍어줄게. 잠깐……, 보여?"



 뒤이어 화면에 파랗고 빨간 점들이 가득 차 깜빡거렸다. 토리는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며 우체통 위치를 확인했다. 리안이 아는 곳이냐 물으니 대충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화면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였다.



 -"파란 색 점이 색이 변한 적 있는 곳이고, 빨간 색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곳이야."

 "이렇게 보니 우체통이 생각보다 많네요. 요즘은 편지 같은 건 거의 안 써서 많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애셀 씨, 변색된 우체통에서 발견된 점이거나, 특이점이라거나. 뭐 그런 건 있나요?"

 -"어……. 거기까진 보고를 못받았는데. 지금 받은 자료로 알 수 있는 건, 으음. ……총 아홉 번의 변색이 있었고, 변색된 우체통은 시내 번화가를 중심으로 고르게 분포 돼있고. 갈수록 변색되는 숫자가 늘어난다는 점이랑……. 매번 똑같은 우체통이 변하는건 아닌 거 같고."

 "그렇군요. 관할서에도 한 번 들려야 할 거 같네요."

 "앗, 그럼 서에는 제가 다녀올게요. 두 분은 먼저 가서 조사하고 계세요."

 


 그러자 리안이 혼자서 괜찮겠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토리는 코끝을 훔치며 씩 웃어보인다.



 "헤헤, 네. 저희 집 앞마당 같은 곳이니까, 위치만 말씀해주시면 금방 찾아갈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찍어준 거기, 거기는 아홉 번 다 색이 변했다는 모양이니까."

 "그럼 시립 도서관 앞에 있다던 우체통부터 살펴야겠네요."

 -"뭐 그렇겠……. 어, 어어."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랩이 다소 소란스럽다.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은 애셀이 잠시만, 한 것을 끝으로 마이크가 바닥에 닿으며 탁탁거리는 소리를 낸다. 란씽이 뒷좌석을 힐끔 보니, 다소 긴장한 기색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여태껏 오가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란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브라반트 씨?"



 대답은 잠시 간격을 두고 들렸다. 별 거 아냐, 하고 말을 흐리는 애셀의 발음이 흐리게 뭉개진다. 란씽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재촉하려는 찰나,



 -"뭐해요, 브라반트 군?"

 -"얼른 와서 더 드세요. 피자 다 식겠어."



 ……아, 아아.



 -"어, 그럼. 잠깐 실례."



 세 사람은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텁텁한 자동차 안 공기 속에 왠지 모를 피자 냄새가 스며있는 기분이 들었다. 침묵은 다소 오래 이어졌고,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잠시 후 토리가 저, 하고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희도 휴게소나 들렀다 갈까요?"



 빠르게 두어 번 깜박거린 토리의 속눈썹 끝이 평소보다 아래로 쳐진 듯해, 리안이 실없이 웃었다.





***





 "그럼 담당 형사님 뵙고 바로 갈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시거나, 이동하시거나 하면 연락 주세요!"

 "응."

 "이따 봐요."

 


 토리를 블루 던 시티 중앙 경찰서 앞에 내려준 뒤, 란씽과 리안은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제의 우체통은 아직 도색 작업을 하지 않은 모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마다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블랙 스커트 시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어, 박사님도 그 얘기 하던데."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은 없나요?"

 -"안 그래도 검토해봤는데, 각 도시 상징색으로 변한다는 거 말고는 없는 거 같……아요. 블랙 스커트 시티 건은 단발성으로 그쳤던 거 같고."

 "그렇군요……."



 리안이 우체통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란씽의 시선을 느낀 리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표면이 약간 울퉁불퉁하네요. 색이 변할 때마다 리페인팅해서 그런가 봐요. 여기, 흘러내린 자국도 있고."

 "음."

 -"아, 샘플 채취할 수 있으면 해오라는데. 페인트 안료가 변이한 걸지 모른다나?"

 "그럼 우체통이 손상되지 않을까요? 이것도 엄연한 기물훼손인데."

 -"잘 안 보이는 부분은 괜찮지 않아? 바닥 부분이라든지, 귀퉁이라든지. 어차피 안 보이면 상관 없지 않나."

 "그래도……. ……란씽씨?!"



 이미 란씽은 뭉툭한 손톱 끝으로 우체통 바닥을 슬슬 긁고 있었다. 리안의 동그란 눈과 마주치자 머쓱해하며 그만두긴 했지만, 이미 손톱 끝에 굳은 페인트 조각이 걸려 있었다. 



 "란씽씨, 그건……."

 -"거기 아저씨가 했나 보네. 어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게." 



 잠시 말을 고르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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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Name : 천 란씽 (陈蓝星 chénlánxīng)

ID : Lanxing_C

Sex / Age / Height : Male, 34, 189cm

Blood / Eyes / Hair : RH+O, dark brown, black

Position : 중앙수사국 특수재난관리과 필드 요원



인상착의, 성격 및 어투, 구사언어


-동양계. 짙고 곧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딱딱해보이는 무표정.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다. 머리칼은 앞머리가 눈썹에 닿지 않을 만큼 짧게 유지한다. 어깨가 넓고 다부진 체격. 무채색 트렌치코트에 검은 목티를 즐겨 입는다. 실내에서는 활동성 좋은 옷을 선호. 양복, 정장류는 꺼린다.

-답답할 만큼 우직하고 끈기 있다. 다소 벽창호. 생긴 데 비해 다정한 구석이 있다. 자기 생각은 확실하나 남에게 피력, 설득하는 일이 드물다. 강하게 의견을 내비칠 때는 대개 요원의 안전이 걸린 경우. 말보다 행동이 빠름.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갈 수록 줄고있다. 아이와 노인이 어렵다.

-공용어가 서툴던 시절의 습관으로 말이 짧다. 보통은 필요한 말만 단답형으로. 존댓말은 하십시오체, 반말은 해체. 반말 선호.

-공용어, 중국 보통화.



무기/특수능력


-휴대 무기 없음.

-능력 : 신체 강화, A+

일정 시간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단순히 근력을 높이는 것 부터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맨 손으로 건물을 때려부술 수 있을 만큼. 패널티는 마비로 능력을 사용한 시간에 비례해 전신이 마비된다.

오랜 시간 신체 전반에 특수 능력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체·근력 따위가 월등히 좋다. 이에 따른 페널티는 누적되었다가 신경이 부분적으로 영구 마비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장기간, 그리고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현재는 목 아래의 피부 감각이 마비된 상태. 미비한 촉각, 압각정도만 느낄 수 있다. 영구 마비가 상당 이상 진행된 이후 신체 내부에 산발적으로 원인 불명의 고통을 느낀다.

여러가지 이유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삼간다.



이력 및 특기사항


-검정고시로 고졸.

-상해 전과 있음.

-특재과 필드 요원 근무 5년 차. 일전에 어느 아파트촌에 작은 뜨개방을 꾸려 겸업도 했으나, 치프가 바뀐 이후로 가게를 정리하고 수사국 근처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다.

-팔극권八極拳, 벽괘장劈掛掌 권사.



기타


-취미는 수공예 전반. 가장 즐겨하는 것은 자수로 손이 빠른편. 시간이 빌 때면 뭐든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일 년에 한 번 일이 주 남짓의 장기 휴가를 신청한다. 이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휴일에도 출근.

-외동. 양친 모두 사망한 뒤로 줄곧 혼자 살고 있다.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준 것으로, 란씽화(蓝星花)라는 꽃이름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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