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자, 티셔츠, 조끼, 스티커……. 꼭 아이돌 팬클럽 소품 같다. 하긴, 열광하는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할지도 모른다. 란씽은 리안이 꺼낸 선데이 모닝 관련 물품들을 쭉 훑으며 생각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변에 연관 지어 생각하길 좋아했다.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길 가다 동전을 주워도 이변,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쳐도 이변, 벽에 걸어놨던 시계가 떨어져도 이변, 상사가 오늘따라 친절해도 이 역시 이변이라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크고 중요한 일까지 그랬다. 선데이 모닝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라고. 보고받은 바로는 그렇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는 란씽은 이름자나 겨우 들어본 정도다. 다만, 저곳의 머리꼭지에 있는 자들이 머리 꽤나 쓴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좋은 머리를 무얼 위해 쓰고 있는지는 더 쑤셔봐야 알 일이다.
일행이 뿔뿔이 흩어진 뒤로도 란씽은 조금 더 고민했다. 발로 뛰어 둘러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터다. 란씽은 익숙하지 않은 페이크 앱 메인 페이지를 해맸다. 타임라인은 일정한 속도로 쭉쭉 밀려 올라왔다. 전자기기와 영 친하지 않은 그로서는 따라 읽는 게 고작이다. 란씽은 휴대폰을 몇 번 더 조작하다 이내 포기한 듯, 목폴라 끝의 마이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중형 승합차 수배 부탁해."
-"승합차요? 봉고?"
"응."
-"알았어요. 곧 준비해볼게요. 위장은 어떤 걸로?"
조금이라도 란씽과 어울려 본 사람은 안다. 그가 거짓으로 꾸미고 가장하는데 굉장히 서투르다는 것을. ……그러니까 되도록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으면서도 관찰할 수 있는, 유리창 너머로 훑어보는 정도가 무난하고 좋을 것이다. 요컨대, 택배 배달원 같은.
2.
란씽은 랩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정확히는 어디까지가 랩의 영역인지를 모른다. 그저 어렴풋, 제가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니 랩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거니 여기고 있다. 종종 놀러 가듯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때도 있지만 그뿐, 공용어가 익숙해진 지금도 랩 요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전문용어가 거의 그렇다. 다만 다른 과에 비해 작고 일손도 부족한 랩에서 그토록 많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감탄한다. 지금도 그렇다.
-"스티커로 급조하긴 했는데, 다른 굿즈랑 비슷한 느낌으로 뽑아봤어요. 명색이 배달원이니까, 트렁크에도 적당한 걸로 좀 채워넣었구요."
"고마워."
-"뭘요."
검은 승합차 옆면으로 노란색 9와 1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문구 - 마음까지 전해드립니다, OO플라워몰.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그보다 분명 택배 배달원이라고 한 것 같은데 꽃 배달이라. 정말 꽃이 있을까 싶어 화물칸을 열어보니, ……있었다. 꽃다발과 꽃바구니가 종류 가릴 것 없이 한가득.
-"어때요?"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웃음기 섞인 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분들하고 상의해서 고른 건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다녀올게."
-"꼭 모두 다 배달 하셔야 해요? 저렇게 예쁜데, 시들어버리면 아쉽잖아요."
란씽은 말없이 모자 챙을 눈썹까지 푹 눌러썼다.
3.
-"해리스군이 91번 버스에 탑승했어요. 노선표 확인해주세요."
-"레드 페퍼 시티 다음은 음, 블루 던 시티네요오."
-"그쪽으로 간 사람은……."
-"미스터 천."
"가고 있습니다. 호수 공원."
-"QR코드는 스캔해보셨어요?"
"응. 단서는 OO색 사람의 손안에."
루시가 마뜩찮은 듯 혀를 찼다.
-"블루 던 시티는 파란색이겠군요."
-"파란색 사람……. 그림이나 동상 같은 걸까요?"
-"보면 알겠지. 미스터 천,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십 분 이내."
-"서둘러 줘요."
란씽이 핸들을 크게 꺾었다. 한적한 도로 위, 큰 곡선을 그리는 바퀴가 마찰음으로 요란했다. 그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랩까지 들렸는지 누군가 너무 밟진 말라며 걱정스레 덧붙였다.
***
파란색 사람은 빨간색 상자만큼이나 직관적이었다. 호수 공원 입구 맞은 편에 큼지막한 동상이 하나 있었다. 군데군데 거뭇하게 변색된 파란 동상 옆으로 표지판도 하나 붙어 있었다. 블루 던 시티 초대 시장이라고.
그리고 란씽은 벌써 삼십 분째 동상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아직인가?"
"……."
-"대답해, 미스터 천."
"아직입니다."
토리가 찾은 QR코드는 우체통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고 했다. 아마 이 동상도 어딘가에 코드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코드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 번씩 더듬어보았는데도 손끝에 걸리는 것 하나 없다. 정차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루시가 초조하게 란씽을 닦달했다. 랩 요원들도 덩달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나, 쩝하고 마른 입맛을 다시는 소리라거나. 란씽은 꼭 말아쥐어 하늘로 치켜든 동상의 왼손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찔끔거리며 내리는 눈송이가 주먹 위로 얕게 쌓였다. 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내리자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진 오른손이 보인다. 왼손과는 다르게 가볍게 반쯤 말아, 엄지와 검지로 까만 틈이 보였다.
"양손 모양이 다른데."
-"앗, 그거 수상한데요오."
-"……단서는 파란색 사람의 손 안, 이라고 했죠?"
"확인할게."
생각보다 틈이 좁았고, 검지 손가락은 마디가 걸려 그 안으로 채 들어가지 않았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써서 한참 긁어댄 끝에 손끝에 흰 종이가 딸려 나왔다.
"찾았어."
코드를 스캔하자 화면에 웹 페이지 하나가 떠올랐다. 파란색 제목 아래로 까만 글자가 빽빽하다. 란씽은 먼저 링크와 캡쳐 화면을 랩으로 보낸 뒤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었다. 블루 던 시티는 이곳, 호수 공원 앞 동상에서부터 운행하는 듯 했다. 쭉 훑어 내려가니 맨 마지막에 링크 하나가 덜렁 남겨져 있었다. 무심코 주소를 꾹 누르자 바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어플리케이션 다운로드 화면이었다.
"91승차권."
-"네?"
"운행표 맨 밑 주소. 앱 다운 경로 같아. 앱 이름은 91승차권."
-"앱이라고요? 잠시, 이쪽에선 그냥 페이크 페이지만 열리는데……."
"시간 됐어. 미스터 천, 버스는?"
곧 왼편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어렴풋 들렸다.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려한 민트색으로 도색한 외관에 솜사탕 같은 귀여운 마스코트를 단 대형 버스가 건물 사이로 나타났다.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버스도 모두 끊긴 시간이었다. 란씽은 막 코너를 도는 버스를 보며 말했다. 어느새 가는 눈송이는 질척이는 우박으로 변해있었다.
"옵니다."
4.
버스 안은 란씽의 막연한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최소한의 좌석과 손잡이가 다닥다닥 달린 시내버스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우등 좌석 버스처럼 크고 널찍한 의자가 두 개씩 두 줄, 자리마다 있는 컵홀더와 간이 탁자. 일개 버스치고는 지나치게 시설이 좋다. 란씽은 저를 위아래로 훑는 버스 기사에게 방금 다운받은 어플리케이션 화면을 보여줬다. 버스 기사가 턱짓한 쪽에 단말기가 있었다. 휴대폰을 가져다 대니 삑하는 기계음과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구원되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버스가 출발했다. 아무리 서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치 빙판 위로 미끄러지듯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쓱 훑어보는 시선 끝에 토리가 눈에 띄었다.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란씽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몸을 움찔했으나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옆자리, 긴 생머리의 여성은 자기 얘기에 심취해 그저 조잘거리고 있었다. 란씽은 버스 맨 뒤의 빈자리에 앉았다. 버스 안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였다. 워낙 의자가 크고 넓은데다 자리마다 붙어있는 편의 시설따위가 많아, 실질적인 좌석 수는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도 다 차있지 않고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탑승 완료. 다음 지시 부탁.]
[@Lanxing_C 캐낼 수 있는 만큼 캐내.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갈 것.]
역시 막연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란씽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창 너머로 어두운 도시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조용했고, 낮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까지 어렴풋이 들렸다. 란씽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간간이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간만에 강의 왔는데 너무 늦어서……."
"……학교에선 뭐라고……."
"……다음 주부터 강의실 변경한다던데, 공지가……."
"……오늘 전달받은 작업하는데 어떤 거지가……."
"……지난번에 교수님하고 상담했었는데……."
강의, 학교, 교수님, 강의실. 대화 내용만 들으면 평범한 대학생들의 것이었으나, 말을 주고받는 이들 중에는 분명, 대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신도 다수 대학 용어를 은어 ]
보고를 위해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누르는데 문득, 이질적인 단어 하나가 섞여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작업?
란씽은 단어가 들린 쪽을 곁눈질했다. 젊은 사내가 한쪽 어깨로 휴대폰을 받친 채 떠들고 있었다. 승객 중에선 목소리가 제법 두드러지는 편이라 뭐라고 말하는지 무리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 그거. 교주님께서 시킨……. 작업할 때 한 번도 누가 참견한 적 없었는데 말야. 왜, 다들 이변이다 싶으면 폰 꺼내서 사진이나 찍고 트위터나 하고 말잖아. 어어. 근데 그 거지는 막 끼어들더라고. ……글쎄 그랬다니까? 그래도 시키신 대로 잘 마무리했어."
……아무리 들어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할 법한 말들은 아니다. 화제는 곧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란씽은 그제야 멈췄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은어로 사용. 신도 한 명 이변에 대해 언급. 닉이 목격한 이변 추정. 이변을 작업으로 지칭.]
[@Lanxing_C 계속 감시해.]
버스는 중간 중간 특정 장소에 정차했다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몇명씩 버스에서 내리고 그만큼 다시 채워진다. 그런 와중에도 놀라울 만큼 관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차창 밖 풍경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버스가 란씽을 태운 이래로 쭉 멈춰있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대화 중. 이후 작업 언급 없음.]
[통화 종료. 특이 사항 없음.]
[블루 던 마지막 역 정차. 남자 하차. 미행?]
[@Lanxing_C 됐어. 그보단 목적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
[@Lady_Ruthy 확인.]
어느새 토리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종전의 사내를 감시하는 사이 버스에서 내린 걸까. 란씽은 보고하기 급급해 대충 건너뛰었던 타임라인을 훑어내려갔다. 단답형으로 점점이 이어지는 제 트윗 사이로 활짝 귀여운 이모티콘이 보였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선배님들! 저 번호 땄어요!! X')]
블루 던 시티를 벗어난 91 버스가 블랙 스커트 시티로 접어들고 있었다.
5.
"천란씽, 토리 헤더웨이, 하차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침 해가 밝고 나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란씽이 버스에 탔던 블루 던 시티의 호수 공원 앞이었다. 91번 버스는 블랙 스커트 시티에서 퍼플 포레스트 시티로, 그리고 다시 레드 페퍼 시티로 향했다. 순환선이었던 것이다. 레드 페퍼 시티 관광 안내소로 돌아왔다고 보고했을 때, 인트라넷 타임라인은 탄식으로 덮였다. 결국, 루시가 원하던 91번 버스의 목적지는 알아내지 못한 채로 일단락되었다.
-"둘 다 수고 많았어요. 퇴근……, 하하. 퇴근하기 전에 일단 수사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에요."
"치프는?"
-"순환선인 거 확인한 다음에 바로 나가셨어요.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음. 곧 갈게."
짧은 기계음을 끝으로 통신이 종료되었다. 란씽은 그제야 무선 이어폰을 빼냈다. 하루 내 이물이 박혀있었던 귓구멍이 얼얼했다. 옆에서 토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꼬박 밤을 새운 셈이니 피곤할 법도 하다. 어깨를 툭툭 짚으니 눈초리를 둥글게 휘며 배시시 웃는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어요. 어느 정도 수확은 있었기에 주고받는 인사는 마냥 무겁진 않았다.
"이렇게 밤샌 건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이에요."
"가는 동안 한숨 자."
"선배는요? 선배도 피곤하실 텐데."
"괜찮아."
바닥은 밤새 내린 것으로 질척거렸다. 찰박거리며 한참 걷던 두 발걸음이 검은 승합차 앞에서 멈췄다. 마음까지 전해드립니다, 하고 토리가 차 옆면의 문구를 소리내 읽었다.
"꽃배달……. 로맨틱하네요. 선배 아이디어에요?"
"아니."
한 글자씩 힘줘 말하자 토리가 큭큭 웃었다. 한나절 내내 꽃다발을 싣고 다닌 차 안에는 꽃향기가 채 가시지 않고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토리의 긴 속눈썹이 가물거렸다.
란씽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무리 느긋하게 엑셀을 밟아도 차체는 위아래, 앞뒤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
이날...많은 일이 있었지(헬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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