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어느 센티넬의 가이드였다. 당시 국가 소유의 센티넬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자로, 그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한다. 아버지는 십여 년을 그녀의 가이드로 살았고, 아마, 그녀를 덮친 불운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녀의 가이드로 곁에 남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센티넬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떻게 희생했는지, 센티넬을 잃은 뒤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따위를. 언젠가 너 역시 겪을 일이라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저 전해 듣기만 한 과거의 아버지와 앞으로 올 제 미래가 쉬이 그려지지 않았던 것도 기억한다.
어머니는 센티넬을 잃고 망가진 아버지를 지킨 단 한 사람이었다.
센티넬도 가이드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 앞에 슬리퍼 한 쌍이 흐트러져 있는걸로 보아, 또 급한 호출로 집을 비운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불시에 불려 나간 날의 선하는 으레 한계까지 혹사당하곤 했다. 평소라고 설렁설렁 일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선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쥐어짜댔다. 그들이라고 센티넬이 감당할 후폭풍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센티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같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기에 그까짓 것은 아무래도 좋을테지.
언제쯤 불려나간 걸까.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을까. 마중 나가도 괜찮을까? 아니, 부르기 전에는 오지 말라고 했던가. 물건을 떠넘기듯 선하의 어깨를 밀던 누군가가 한 말을 기억한다.
'가이드 주제 건방지게.'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란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오는 대로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옷을 벗으려다, 이곳이 주인이 자릴 비운 남의 집이라고 깨닫는다. 집에 돌아온 선하가 그런 저를 어떻게 생각할 지. 아마 폭주하는 선하에게 그런 사소한 걸 신경쓸 여력은 없을테지만,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란씽은 얼른 옷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소파에 바르게 앉았다. 큼큼, 멋쩍은 헛기침을 마지막으로 집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주인이 없는 집은 평소보다 조금 더 휑하다. 란씽은 거실을 쓱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취미도, 특기도 없는 선하는 꼭 필요한 세간만 간소하게 두었다. 좋게 말하면 정갈하고, 나쁘게 말하면 삭막하다. 눈 닿는 곳마다 보이는 서류더미나 파일철마저 없었다면 아예 사람 사는 곳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하에겐 정말 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선하를 불행하게 한다. 란씽은 그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어디까지 간섭해도 좋을지 재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 떠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끊어내듯, 얌전히 앉았던 란씽이 일어났다.
빈집을 멋대로 둘러보는 건 실례지만, 눈에 보이는 걸 구경하는 정도는 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봐도 모르는 것투성이라 금세 흥미를 잃겠지만. 란씽은 느긋이 걸음을 뗐다.
***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웃도는 센티넬이나,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만 못했다. 가이드는 센티넬의 산소이자 옷이며 끼니였다. 듣자니, 어떤 센티넬은 가이드를 제집에 감금하다시피 험하게 취급한다고 한다. 모든 가이드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나, 어떤 짓을 하든 암암리에 용납되고 또 제지받지 않는 것이 센티넬이다.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명목 아래 그랬다.
뛰어난 센티넬의 가이드이기 때문에, 그 센티넬이 한 나라의 앞날을 쥐고 흔드는 선하이기 때문에. 란씽에게는 다른 가이드보다 많은 제약이 따른다. 란씽은, 그 모든 것이 가이드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아버지처럼 센티넬을 잃고 괴로워하느니 그편이 차라리 낫다고.
다행히 선하는 저를 바쳐 지켜낼 가치가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선하를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란씽이 보고 느낀 선하는 그랬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많은 걸 할 수 있고, 또 그런 위치임에도 다른 이를 배려하기가 자연스럽다거나, 자신을 숨기는데 익숙하다거나. 그 정도 뿐이다. 란씽은 선하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까지는 모른다. 다만 들려오는 이야기로,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 짐작할 뿐이었다. 일 관련해 선하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보다 채선하라는 사람의 본질적인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관심 없던 것들이 조금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재였다. 안쪽에 있는 책상 제일 위에 놓인 사진 몇 장, 그 아래로 글자가 빼곡한 종이가 흩어져있었다. 서류 사이사이로 비슷한 사진들이 섞여 있다. 발치에도 몇 장 정도가 채였다. 그만큼 어수선 했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사진 한 장을 집었다. 사진 속에는 어느날인가의 제 모습이 있었다. 모든 사진, 모든 종이가 그랬다. 어디에든 란씽에 관한 것이 담겨 있었다. 란씽은 종이에 그려진, 적힌 것들을 빠르게 읽었다.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란씽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손에 쥔 사진을 놓지 못했다. 무슨 낯으로 선하를 봐야할 지 몰랐다. 그렇게 허둥거리다 서고에 들어온 선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란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변명조차 입에 담을 새 없이, 선하가 입을 열었고. 란씽은 깨달았다…….
***
선하는 몸을 채 가누지 못하면서도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란씽은 선하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옷 밖으로 드러난 모든 맨살에 입을 맞추며 묵묵히 들었다. 이윽고 빽빽한 단어가 드문드문 호흡에 먹혀든 뒤에야 선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는 숨이 아직 불안정했다. 옷자락을 움켜쥔 선하의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란씽은 몇 번이고 키스했다. 그럼 갑갑했던 모든 것이 조금쯤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선하의 앞에서 복잡한 생각은 아무 쓸모 없었다. 맞닿은 살, 미지근한 온기만이 전부였다. 그런 사이였다.
이런 식으로 알지 못했다면 평생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들키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얌전히 기다렸더라면. 그런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제가 알고 싶었던 선하가 있다. 저를 끔찍히 아끼는 선하가. 그럼에도 란씽은 기쁘지 않았다. 흐느끼는 선하를 힘줘 끌어안으며, 란씽은 어머니가 들려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렴풋 가늠할 뿐이었던 그 윤곽이 보였다. 센티넬에게 가이드가 어떤 의미인지, 센티넬과 각인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이제야 비로소 실감했다.
네가 센티넬이 아니었다면, 내가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지금 같은 모습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분명 너를 좋아하게 됐을 텐데.
하지만 가이드가 아닌 나는, 너한테 이토록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없을 텐데.
굳이 소리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의 선하는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란씽은 그런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선하가 저를 좋아하는 감정과 제가 선하를 좋아하는 감정은 비슷한 종류일 지 모른다. 아주 겹치지 않는 종류일 수도 있다. 섯불리 확실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선하에게 좋아한다 대답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받는 사랑에 돌려주기엔 너무나 비겁한 마음이었다. 아마, 선하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모르는 척 입을 다물 것이다.
막 싹을 틔우고 나온 감정을 짓밟으며, 란씽은 눈을 떴다. 그리고 지쳐 늘어진 선하를 조심스레 고쳐안고 서고를 나왔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어울리는 장소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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