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길었던거 같은 기억이 나니까 접음
근데 별로 안 길면 창피해서 어떡하지(초조
1
양친 모두 떠나고 없는 집이었다.
낮에는 햇볕이, 밤에는 바람이 빈자리를 채웠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곳이었으나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가 혼자이기 때문에 더욱.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도장에 있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지붕들이 파르스름할 무렵 문을 열고,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히 뜨면 도장을 정리하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후계 수업을 받아 정식 사범으로 인정받은 뒤로는 거의 그렇게 살았다. 아버지, 천량웨이가 죽은 뒤로도 변한 것은 없었다.
마냥 무술에만 심취해 사는 것은 아니었다. 도장을 닫고 집에 돌아오면 라디오를 틀어놓고 수를 놓거나 뜨개를 했다. 만든 것은 부모님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하나씩 두고 오거나, 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대단한 이유나 보람은 없었고, 어머니가 살아생전 한 것을 흉내나 낸 정도였다.
처음 도장을 물려받았을 때는 그저 막막했다. 그러나 전부터 홍보나 경영을 도와주던 아버지의 오랜 친구 덕분에 관원을 지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문파 규모는 선대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한 입 먹고사는 정도로는 넉넉했다.
서른 즈음부터 주변에서는 혼인에 대해 한 마디씩 보태곤 했다. 후계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모르는 여자의 사진 따위가 들어오는 날도 있었으나 한사코 거절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다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이 집에서 남은 생을 홀로 보낼 것이다.
물론, 문득 없는 사람의 자리가 지독히 그리워질 때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새사람을 들이기엔 혼자 산 기간이 너무 길었다. 가문이나 문파의 후계를 이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채워질 빈자리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라고, 왠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천란씽’은 평생을 혼자 살았다. 그렇게 자식도, 후계도 남기지 않고 살던 어느 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썩 행복할 일도 없었다.
근무 도중, 차 안에서 눈 붙인 그 잠시간의 꿈이었다.
2
얼마 전 큰 사건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주동자와 주요 공범들은 재판을 받고 있었고, 그 잔당이 아직 얼룩처럼 남아 이런저런 사고를 저지르고 있었다. 완벽히 닫힌 사건은 아닌 셈이다. 랩에서는 당분간 자잘한 뒤처리를 해야 할 거라 보고 있었다.
이렇게 부서 내 요원 대다수가 투입되는 큰 사건이라면 매해 한두 건씩은 꼭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조금 특별했다. 사건의 주동자, 교주가 내건 '또 다른 세계'라는 말 때문이었다.
또 다른 세계 스테이지 B. 란씽 역시 그 세계에 가보았다. 흰 토끼를 따라 끝 모를 구멍에 뛰어들었던 어느 소녀처럼, 작은 계집아이를 쫓아 여러 이 공간을 넘은 끝에 도착한 마지막 스테이지였다. 그곳에서 요원들은 모르는 얼굴뿐인 낯선 수사국의 유능한 인재 하이디 진과 루스 로테스트와 대면했다.
여름엔 굵은 비가 내리고 겨울엔 흰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아무도 평화로운 오늘이 계속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가며 마주친 모든 이의 얼굴에 이변의 그늘 따윈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니, '이변'이라는 단어가 본래의 뜻 이상으로 쓰일 일이 없을 곳이었다. 기분 탓이었을까, 그 세계의 ‘오늘’은 유독 맑았고, 요원들은 서로 말을 아꼈다.
이제 그곳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특수 재난 관리과의 시니어 요원들과 부서장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스테이지B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그 세계를 연상시키는 말이라도 나오면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이변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변 없는 세계를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부질없지만 란씽 역시 몇 번쯤은 상상했다. 막연히 도장을 물려받았겠지, 하고 그리는 정도. 확실한 것은 이변이 없었더라면 평생 고향을 벗어날 일도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 세계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은 이들에겐 아물지 않는 상처 같은 곳이었다.
꿈에서 깬 란씽은 가장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37분.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지 겨우 삼십 분 남짓 지나있었으나, 어쩐지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란씽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천천히 문질렀다. 아마 손바닥에 감각이 살아 있었다면 버석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눈꺼풀 아래로 좀 전의 꿈이 자꾸만 덧그려졌다. 꿈에서 본 자신은 어렴풋이 상상했던 모습보다는 제법 그럴싸했고, 생각보다 더 허전해 보였다. 그런 느낌이었다.
새벽 다섯 시, 아까 맞춰뒀던 알람이 울렸다. 하늘이 푸름이 점차 옅어지고 건물 사이로 노란빛이 솟구치는 동안에도 란씽은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3
그래서였을까. 휴대폰 액정에 뜬 선하의 이름을 보았을 때,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유월, 여름이 시작할 즈음. 그늘 밖으로 나가면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란씽은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특수 능력에 의한 범죄로 추정되는 사건에 밤새 증거를 쫓고 난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 오전부터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기 시작해, 오늘 내로 랩에 증거물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범인이 남긴 증거를 사진으로 찍고, 그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비닐에 담고 있었다. 이미 능력자를 몇 명인가 추려놓았으니, 감식 결과만 나오면 곧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나중에 쓸 보고서 내용을 간추리는 가운데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냐고,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선하가 물었다.
-“란씽,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란씽은 잠시 선하가 말한 예전에 대해 생각했으나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어떤 거?”
-“히어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순간 조금쯤 지쳐 보이던 그날의 선하가 떠올랐다. 잊어버릴 리 없다. 선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사실, 선하와 있었던 모든 순간이 그랬다. 오늘은 소나기가 내릴 거라고 말해주던 날도, 조근조근하게 포커 규칙을 설명해준 날도, 연구실 앞에서 부드럽게 몸을 비켜서던 그 날도 란씽은 기억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세탁실에서 마주치고, 휴게실에서 파란 나비를 보내고, 꽉 조인 넥타이를 고쳐 매주고 가까운 술집으로 술을 마시러 갔던 모든 날을.
-“그랬더니 당신은 히어로가 아니라고 했죠.”
“응.”
“별로 상관없다는 거, 말하지 않았던 거 같아서요.”
조급한 듯 아닌 듯, 평소보다 말하는 리듬이 빠르게 느껴졌다. 란씽은 잠시 숨을 고르는 선하의 침묵을 기다렸다.
이어진 목소리에는,
“좋아해요.”
망설임이 없었다.
“당신이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아주 가끔 선하는 란씽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나쁜 뜻은 아니다.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모를, 그런 말을 속삭일 때가 있는 것이다. 힘겹게 어느 이변의 이브를 견딘 다음에도, 잠에 젖어 눅눅한 목소리로 떼를 쓸 때도, 란씽을 어딘지 먹먹하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란씽은 몇 번이고 헛숨을 들이켰다. 입술이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제대로 된 단어로 정제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그 날의 선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선하는 말을 마친 뒤로도 란씽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마를 짚고 한참을 앓듯 끙끙거리다 말할 수 있었다.
"랩. ……랩으로 갈게. 오늘. 늦을 거야."
아주 오랫동안 선하를 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다. 선하와 눈을 맞추고, 선하를 끌어안고, 체취를 맡고, 차가운 듯 미지근한 살갗에 뺨을 비비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기다려줘."
통보 같은 말에도 선하는 기쁘게 대답해주었다.
4
철든 이후, 단 한 순간도 죄책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늘 새로운 빚이 심장 위로 무겁게 쌓일 뿐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 절망적인 마음의 빚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면 남은 생은 평생 이렇게 속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자조 섞인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 적 있다. 특수 능력이 없었다면, 녀석을 불구로 만들지 않았다면, 페널티에 좀먹혀 아버지의 호흡기를 떼지 않았더라면. 오해하지 않았더라면.
편했을 거라 생각한다. 죄를 갚기 위해 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세상을 무를 수도, 벌어진 일을 없었던 걸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돌릴 수 없다면 지고 갈 뿐이다. 그렇게 인 것은 어깨에, 목에, 다리에 눌러붙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심장을 짓누르는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굶주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마른 가슴은 달콤한 물 한 모금으론 만족하지 못해 게걸스럽게 탐했다.
한 번 더, 조금 더. 더 많이, 하고.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바란다.
5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랩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이 애매한 이변적 증거물을 들고 있다. 다행히 그대로 이성을 잃고 랩으로 직행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선하 생각뿐이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얼른 일을 끝내고 사무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아침부터 굴뚝같았다. 새벽녘, 잠시 눈 붙인 잠시간 꾼 꿈 때문인지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선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란씽을 발견하자 스르르 미소 짓는다. 란씽은 한달음에 선하 앞으로 달려갔다.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선하를 두니 소금이 물에 녹듯 사라져 버렸다. 란씽은 조심스레 선하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선하가 란씽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만 조금 기울여 그 손가락에 얼굴을 기댔다.
문득, 지금 끌어안아 버리면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지진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에 덜컥 겁이 난다. 선하를 지각知覺의 너머로 보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선하는 그런 란씽의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여기 있어요.”
란씽은 홀린 듯, 뺨을 받치던 제 손을 목 너머로 미끄러트렸다. 손은 흰 가운 위를 가로질렀다. 등을 지나 날개뼈, 허리를 느릿하게 더듬는 동안, 두 사람의 몸이 점점 가까워졌다. 란씽은 남은 한 손을 선하의 허리에 두르곤 제 뺨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선하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손바닥에서 손목, 팔, 어깨를 지나 쇄골과 목을 입술로 훑었다. 마지막으로, 란씽은 선하의 안경을 벗겨냈고, 선하는 란씽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나는 감히 너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