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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DIS'에 해당하는 글들

  1. 2018.10.29  20140401
  2. 2015.01.27  <그러고보니 이렇게나> 샘플
  3. 2014.12.20  나는 감히 너를 원한다
  4. 2014.11.12  달콤한 버릇
  5. 2014.09.23  꿈의 끝
  6. 2014.09.06  시들어 지는 꽃
  7. 2014.07.15  이변의 잔흔
  8. 2014.06.29  ((마저 이어쓰고 제목 붙인다고 우기는 변명))
  9. 2014.06.22  다음 날, 오전 열두 시 육 분
  10. 2014.06.20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20140401






1.



 처음 뵙겠습니다. 천란씽씨죠? 

 받으세요. 그동안 당신이 보냈던 돈입니다. 

 …….

 동생이 퇴원한 지는 반 년 정도 됐습니다. 얘기는 들으셨나요?

 …….

 그렇겠죠. 결론부터 얘기할게요. 동생은 평생 걸을 수 없게 됐습니다. 퇴원한 뒤로도 계속 제 방에 틀어박힌 채로 술만 퍼마시고 있어요. 

 …….

 ……우리 집이……, 이런 돈을 받아야 할 만큼 궁하진 않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버러지같이 살아도 평생 그 아이 뒤 닦아줄 만큼은 산다는 뜻입니다. 그쪽 사정에 매달 이 정도 돈을 보낸 성의는 인정합니다. 일의 경위도 납득했습니다. 그 아이 평소 행실이 경박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쪽을 용서하겠단 뜻은 아닙니다. 어디 내놓을 만큼 자랑스런 동생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래도 피붙이는 피붙이더군요. 고작 이런 알량한 돈푼으로 위로나 사죄할 생각이셨다면, 정말, ……. ……아닙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더 하실 말씀 있나요? 

 …….

 그럼 먼저 일어나죠. 




 영수증을 낚아챈 여자가 잰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란씽은 대답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멍청히 앉아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두툼한 봉투, 여자가 목을 한 번 축인 미지근한 커피와 잔잔하게 흐르는 오래된 경음악이 한데 섞여 빙빙 돌았다. 현기증마저 느껴져 이마를 짚는데, 갑자기 강렬한 통증이 몸을 꿰뚫었다. 란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먹 쥔 양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란씽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한동안 숨죽여 천장을 노려보았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빛이 천장을 가로지르며 한 뼘씩 길어진다. 그동안 통증은 불규칙적으로 심해지거나 잦아들거나 하며 이어졌다. 이렇게 수면 아래 가만 숨죽이던 것들이 돌연 자맥질할 때가 있었다. 불편하지만, 지금은 둘 다 제법 익숙해졌다. 란씽은 다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그저 견뎌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목구멍 아래로 또아리 튼 것을 여러 번 길게 내뱉으니 그제야 숨이 트였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란씽이 쭉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해가 건물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2.



 늘 먹던 약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혹시 사무실에 남은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도 약은 없었다. 한참 제 자리를 뒤적거리다 문득, 며칠 전에 마지막 약 봉투를 찢으며 슬슬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던가. 란씽은 통증이 지나갔던 부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지나갔을까, 아니면 다시 두드릴까. ……로빈스한테 맡겼다던 진단표는 아직 남아있을까. 

 짧은 생각 끝에 휴게실로 향했다. 


 검사를 받고 돌아오면 사무국으로 돌아오기엔 조금 늦고 집으로 가기엔 조금 이른 어중간한 시간이 된다. 그 들뜨는 시간에 같이 술이라도 마시면서 어울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란씽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3.



 이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철썩 소리를 내며 힘차게 백사장을 때리다가도 슬슬 뒤로 물러나고, 그렇게 끝없이 반복하며 흰 물거품이 부서지는 모양에 눈을 빼앗겼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발목이 푹 잠길 만큼 파란 물이 차올라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변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은 늘 파랬다 노랬다 벌게지는 태양 빛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모든 일이 그러했다. 이변은 걔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파도가 해변을 쓸어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는 날카롭게 후비고 할퀴어, 그 흔적을 분명히 남긴다. 

 어느 날을 경계로 갑자기, 같은 일은 없었다. 마비는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몸을 잠식했다. 사지의 끝에서 타고 올라오듯 시작된 란씽의 페널티는, 몸통에서 한데 엉겨붙더니 가속도가 붙어서 목 아래까지 넘실거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아마 2년 전 즈음. 몸 안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것은 생각보다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다네."




 란씽의 검사 결과표를 한참 들여다보던 프로페서 닉, 닉 맥플러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가벼운 질문과 대답으로 분위기를 녹였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란씽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한 부분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삐걱거리기 마련이야. 톱니바퀴 사이에 작은 이물질이 물리는 것만으로 기계 자체가 고장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일세. 이건 조금 오래된 자료이네만, 자네처럼 감각신경만 마비된 환자가 학계에 보고된 바 있네. 몇 주에 걸쳐서 전신의 감각 세포가 마비되었다더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사내는 마비가 진행될수록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단 점이네. 펜으로 글씨를 쓰거나 단추를 잠그는 것 같이 손으로 하는 섬세한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하네. 그럼 천군은 어떤가?" 

 "이상 없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걸세. 군의 피부감각 마비가 상당 이상 진행된 지금,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변'이니 말이야. 피부 감각으로 받아들인 자극은 균형 감각을 이루는 한 축이 되기 때문인데, 으음. 걷는 걸 예로 들어볼까.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각이나 관절 위치는 감각신경이 받아들이는 자극에 따라 저절로 움직인다네. 그게 마비되면 눈으로 바닥과 자기 몸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조절할 수밖에 없네. 그래서 마음대로 걷고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는 게야. 우리 몸은 생각보다 촉각에 많은 의지를 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걷는 것뿐만 아니라……, 천군의 취미가 자수였던가?"

 "네."

 "아직 문제없이 하고 있을 테고."




 란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깐 시선 끝에 한 김 식은 찻잔 손잡이를 말없이 매만지는 주름진 손이 들어왔다. 




 "……허허, 너무 많이 돌아왔구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천군. 일전에 내가 군에게 했던 말이 있지. 기억하나? 이변은 넘칠 만큼 인과를 따르고 있다고. ……이번 군의 페널티 건은, 말하자면, 인과라는 강을 따라 흐르던 이변이 강 밖으로 범람해 새 물꼬를 튼 것과 같다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은 닉 맥플러리가 안경을 위로 슬쩍 밀며 콧등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앞으로 군의 페널티는 언제 어떤 식으로 악화 되고 변이 될 지 알 수 없다는 걸세. 고통의 주기가 짧아질 수도, 강도가 강해질 수도 있겠지. 군이 앞으로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페널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네. 검사 결과를 봐선, 이미 능력은 군의 신진대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니 말일세. 이건 군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또, 이건 확률적인 문제이네만……,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마비가 진행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 이 이상 감각 세포가 마비되면 어떻게 되는지, 전에 말해줬을걸세. ……그런 뜻이지. 그런 게야."




 마치 병명을 선고하는 의사처럼, 닉 맥플러리는 한 단어씩 조심스레, 하지만 분명히 발음했다. 




 "천군. 나는 모쪼록, 군이 깊이 생각해보고 판단하길 바라네."




 통증을 느끼고, 약 두 달 정도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4.



 "최근 통증이 가슴 쪽에서도 느껴진다고 하셨지요.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 기억하십니까?"

 "오른쪽 갈비뼈 안쪽……,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복부, 왼쪽 허벅지 근육, 오른쪽 갈비뼈 안. 달리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는 없고요."

 "네."

 "확실합니까?"




 윌리엄 그레인저는 세 번씩이나 확인을 받았다. 그러고도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하며 또 묻는다.




 "집요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니 양해해 주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천씨가 느낀 증상에 의존해서 진단해야 하니까요. 참, 검사 결과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라고 해봐야, 늘 그랬듯 모두 정상입니다. " 

 



 이렇게 정상적인 수치가 나오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낮고 빠르게 지나갔다.




 "일단 증상에 맞춰 다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알약 종류가 조금 바뀌었을 겁니다. 졸음이 심하게 오거든 두 번째로 작은 분홍색 약은 빼고 드세요. 한 달 치 드릴테니 다 드시면 그때 다시 오셔서 검사받은 다음에 처방 받으시고요."

 "……검사요."

 "네. 뭘 새삼스럽게 물으십니까. 어쨌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란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고 시선을 조금 낮췄는데, 그것 만으로도 윌리엄은 눈썹을 좁히며 란씽을 흘겼다.




 "검사받으셔야 처방도 해드릴 겁니다."

 "……."

 "……천 씨."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윌리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반쯤 빈 진단서를 마저 채웠다.


 병원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딱 한 달에 맞추지 못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윌리엄의 날카로운 시선을 어찌어찌 흘릴 정도로는 가고 있었다. 주로 약이 다 떨어질 즈음에 날을 잡아 다녀오는 식이었다. 가끔은 병원 갈 시간마저 아까울 만큼 바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조차 윌리엄은 완강했다. 검사받을 시간이 없으면 월차라도 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검사를 받아도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상 없음. 한 번도 정상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다른 수치가 나온 적이 없었다. 늘 같은 숫자가 나왔다는 뜻이다.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든 완벽하게.

 닉 맥플러리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했다. 정확히는, 언제나 일정하게 나오는 그 수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이. 윌리엄도 부분적이나마 그 가설에 동의했다. 물론 이렇다 할 근거 없이 추론한 가설과 예측일 뿐이었고, 의학적 소견이 전무한 란씽은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쯤 되면 정말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지금 몸 상태라, 여러 번 오가야 하는 이런 검사 정도는 생략해도 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닉 맥플러리의 미소가, 윌리엄의 치켜뜬 눈이 조금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실 란씽은 언제 불 뿜을지 모르는 루시의 총구보다 이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차라리 일을 그만 두고 하고 싶은 거나 하며 지내는 게 낫지 않겠냐 말한 적이 있다. 어차피 말세로 치닫는 세상에 내일이 불투명한 몸이라면 원 없이 사는 게 좋지 않느냐고. 일리 있다. 란씽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낫다고도 여긴다. 란씽은 아직, 루시가 처음 저를 스카우트 하러 온 날을 기억한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제가 구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과 어떻게든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간간이 자맥질하는 것들 역시. 

 ……란씽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어중간하게 들뜬 시간대였다. 인트라넷과 전화 주소록을 번갈아 훑던 란씽이 자판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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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 2018. 10. 29. 00:34 SPEDIS




복합 커뮤니티 <중앙수사국 특수재난관리과: SPEDIS>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자캐커플책(BL)입니다.








 별다른 용건 없이, 그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찾아가도 되는 자리에 머무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퇴근하기 전에 얼굴이나 볼까 싶어 랩으로 올라가는데,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누군가의 고함이 되었다. 격양된 어조가 빠르게 쏟아진다 싶더니, 쾅하는 소리를 끝으로 사무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이런 시간대에 사람이 남아있을 만한 곳은 몇 군데 없기에 불길한 생각이 자꾸 스멀스멀 떠올랐다.

 서둘러 복도 끝 모퉁이를 돌자, 설마 하던 루스가 막 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루스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고갯짓으로 인사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 그대로 쿵쾅거리며 란씽을 지나쳤다. 란씽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성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루스는 늘 무언가에 화가 나 있다. 그래서 모니터에 대고 총을 갈기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정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랩에서 나온 루스가 평소보다 더 격분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모쪼록 큰일이 아니면 좋으련만.

 유리문 너머를 힐끗 들여다보니 랩에는 선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늘 무언가를 질겅거리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고개가 떨구어진 바닥엔 서류뭉치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란씽이 랩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돌아선 얼굴이 스르르 녹았다.


 어서 와요. 일은 잘 마무리됐어요?”


 부드럽게 휜 눈에 피로가 비쳤다. 란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사람도 없어.”


 안색을 살피느라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에 선하가 조금 더 기쁜, 혹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종이다발을 내던지는 루스와 지친 듯 시선을 피하는 선하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 루스는 총을 꺼내 겨누기도 했고, 책상을 발로 되게 차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선하는 시위하듯 침묵하는 게 전부다. 상상 속에서나마 맞불 놓지 않는 건 지독히도 선하다웠지만, 정말 그런 식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입안이 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대답해줄 것 같진 않은데. 란씽이 고민하는 사이 선하가 먼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란씽과 시선을 맞추며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미끄러지듯, 선하의 손이 란씽의 목에 감겼다…….


 괜찮아?”


 랩인데. 속뜻을 읽은 선하가 빙긋 웃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제 올 사람도 없는걸.”


 그렇구나, 아무도 없으면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란씽은 한 손으로 선하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일전에 선하가 일러준 지침을 일부 수정했다. 아무도 없는 랩에서 해도 되는 것. 란씽을 가만 들여다보던 선하가 란씽의 손을 잡아끌어 제 허리 위에 올렸다.


 아니면, 서고로 갈까요?”


 나긋한 속삭임이 아주 가까이서 들려온다. 소리와 함께 뱉어진 숨이 턱 끝을 간질였다. 란씽은 대답 대신 선하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벗겼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가 지나고, 한쪽 다리가 접힌 안경이 선하의 랩 가운 주머니 안으로 떨어졌다.


*

샘플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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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었던거 같은 기억이 나니까 접음

근데 별로 안 길면 창피해서 어떡하지(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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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낯선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란씽은 방문 쪽을 힐끗 보았다. 온 집안이 컴컴한 가운데 거실 방향에서 하얗고 노란빛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을 보던 중이었던가. 지금까지 저희 방송을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방송 종료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선율에 섞였다. 얼른 꺼야 할 텐데, 한가로운 생각과는 달리 두 팔은 선하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컸던 탓이다. 한참 제 등과 어깨에 바짝 감겨있던 선하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수고했단 말 대신 귀를 잘근거리니, 으응, 하고 어리광 같은 소리를 냈다. 란씽은 그제야 선하를 침대 위에 눕히듯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위로 당겨 올려진 턱,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찬찬히 쓸던 란씽이 허리를 조금 굽혔다. 미지근한 숨이 점차 가까워진다.

 선하의 입술에선 단맛이 난다. 입을 맞출 때마다 그렇게 느낀다. 지금도. 란씽은 혀로 제 입술을 훔쳤다. 묘한 여운처럼 남았던 단맛이 빠르게 녹아 없어졌다. 그것이 묘하게 아쉬워 쌕쌕거리는 선하에게 다시금 가볍게 키스했다. 한 번, 두 번, 곧 열린 입에서 웃음기 섞인 숨이 터져 나왔다. 젖은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있었다.




 "그렇게 보채지 마요." 




 ……그제야 조금 성급했을까, 생각이 닿았다. 선하는 마른기침을 몇 번 손안으로 뱉고는 란씽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애가 탈만큼 느릿한 몸짓이었다. 밭은 숨이 잦아드는 동안 란씽은 선하의 상기된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넘겼다. 그리곤 드러난 맨 살갗에 제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미지근한 체온, 부드러운 살갗과 물기. 손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에 닿았다. 란씽에게 얼굴은 선하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통로다. 그래서 이렇듯, 틈만 나면 선하의 몸 곳곳에 얼굴을 대고 문지르곤 한다. 입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란씽은 눈가와 콧등을 입술로 쪼다가 뺨을 지나 귀를 덥석 물었다. 뺨에 닿은 선하의 몸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귓가엔 곤란하단 듯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기다렸던 단맛이 혀끝에 떨어졌다. 란씽은 눈을 감았다. 

 그중에서도 입은, 특별하다.



 식사는 적당한 열량과 포만감을 얻기 위한 행위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도, 선호하는 맛도 없다. 음식을 즐기는 법도 잘 모른다. 물론, 단맛을 자주 찾는 편도 아니다. 그랬다면 오래전 주머니를 가득 채웠던 사탕이 그리도 달갑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질리도록 녹여 먹었던 달콤함, 여태껏 먹어봤던 어떤 음식과도 조금 다르다. 부드럽지만 깊고, 혀가 찌릿찌릿할 만큼 강렬하다. 버릇 될 만큼 자극적인 맛이다. 어쩌면 벌써 길들어졌을지도.

 두 입술 사이를 비집고 누구 것인지 모를 숨이 새어나오는가 하면, 그마저도 삼킬 듯 다시 입술을 포갠다. 

 클래식 음악이 잦아든 뒤에는 귀에 거슬리는 신호음이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까? 나중에 더 좋은게 생각나면 고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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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버릇 :: 2014. 11. 12. 03:42 SPEDIS




 사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겨우 남아있는 기억조차 얼룩덜룩하게 빛바란 그림처럼 불완전했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다정했다고, 늘 링거 따위를 맞고있던 손등은 뼈밖에 남지 않아 앙상했다고. 품에 안기면 마른 햇빛 냄새가 났고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고. 머리를 쓸어내리고 뺨을 만지던 따스한 손가락, 어설프게나마 바늘을 잡고 만든 것에 과분할만큼 떨어지던 칭찬.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와 좋은 체격같이 작고 사소한 것 마저 자랑스러워 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 만큼 겹겹이 덧칠하고 기운 기억 속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던 강인함이라거나, 눈을 둥글게 휘며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어머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목구비 생김새 만큼은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망쳐놓은 그림처럼 뭉개진 채로 남은 것이다.

 또 언젠가는 한참동안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며 좋아라 말한 적이 있다. 입술을 다물고 있을때 둥글게 지는 언덕모양 호선마저 똑같다고 즐거이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단언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이런 표정을 한 적은 없었다는 점 뿐이다. 단 한 번도.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먼 발치에 누군가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저 사람을 어머니라고 여겨도 좋은 걸까. 그렇다면 어머니같은 누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피니 무언가를 말하듯 오물거리고 있었다. 하도 먼 거리여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어쩐지 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샤오란, 샤오란, 하고. 이상하다. 란씽은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질척한 모래톱에 파묻힌 듯 사지가 묵직했다. 그래도 이를 악 물고 팔다리를 힘껏 당기며 한발짝씩 나아갔다. 땅을 박찬 발이 다시 바닥을 밟기까지 무던히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 초조한 마음에 아무리 고함쳐도 소리는 목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는다.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낯선 표정이 혀뿌리를 바짝바짝 타게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질책하는 듯, 슬픈 듯,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몸부림 끝에 간신히 손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다랐다. 여전히 어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고, 이만큼 가까이 왔음에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란씽은 어머니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작고 둥근 어깨에 손끝이 스침과 동시에 닿은 곳이 검게 바스라졌다. 그것을 방아쇠로 어머니는 조각조각 흩어졌고, 그 잔해가 란씽을 덮쳤다. 란씽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활활 타오르는 고향집이었다. 불길은 집 전체를 집어 삼키고도 모자라 란씽을 향해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란씽은 망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이제 남은 가구, 물건 하나 없는 빈 집이었으나 불타 없어져도 좋을 곳은 아니었다. 어서 불을 꺼야한다는 생각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머뭇거리는새 란씽은 제 키만한 불길에 둘러쌓여있었다. 여전히 사지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말을 듣지 않았고, 뻘건 불길 너머로 지붕 끝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온 화기보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대로 불에 타죽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무력감이 온 몸을 지배했다. 이런 와중에도 왜인지,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란씽, 하고.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완전히 화염에 삼켜지고 나서야 착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따스한 온기, 익숙한 체취였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누군가에게.






 "선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숨소리에 가까운 이름이었다. 선하가 허리를 숙이자 침대 시트가 부스럭거렸다. 란씽은 선하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고 선하는 식은땀이 흥건한 란씽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코 끝, 눈꺼풀, 뺨, 귀, 차례로 선하의 온기에 누그러졌다. 란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맞닿은 살갖으로 선하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하고. 벌컥거리는 제것과 달리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소리였다. 란씽은 선하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쿵, 쿵, 쿵. 그러면 말로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을 용케도 알아들어, 선하는 란씽의 머리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속삭인 소리에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다.



***


내남자가 내새끼 달래주는거 보고싶엇ㅅ더 내남자는 최고야

누구랑 같이 자본 기억이 없어서 저런 꿈 꿨을 때 누가 달래준 것도 처음이지 않을까 한다 천란씽이 우는 애였으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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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1피는1병으로 내남자를 앓는 천란씽이

마저 다 쓰고 백업하려구 했지만...일단...일단 백업할거야(쓸쓸


슾앤솔에 참가

그냥 올려두긴 심심하니까 샘플 분량이라도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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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보다 어두운 아침이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고, 한낮이 되도록 도시는 재색 물안개로 흐렸다. 정오를 지나자 안개가 차츰 걷혀, 란씽이 막 파견 근무를 끝내고 수사국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하늘도 완전히 갠 뒤였다.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오늘의 날씨와 사건사고에 대해 말했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가시거리가 채 백 미터에 못 미칠 만큼 안개가 짙었고, 그만큼 사고도 사상자도 많은 이변적인 하루였다고. 

 란씽도 조금쯤 그런 하루였다.



 [선하, 저녁은?]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직이에요. 당신은?]

 [가고 있어. 같이 먹어.]

 [응. 도착하면 얘기해요.] 



 선하는 메세지 답장이 빠른 편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다. 오늘은 신호에 걸리는 사이사이 메세지를 보냈는데, 플립을 닫아 옆좌석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렸다. 도착하면 얘기하라는 메세지를 확인했을 땐 이미 수사국 주차장 안이었다. 주차장이야, 자판을 누르며 란씽은 선하가 일하는 틈틈이 제게 메세지를 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그럼 그걸로 좋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곧 내려간다는 답장이 왔다.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선하가 내려왔다. 다른 때 보다 잠이 부족한 날이었고, 낮동안 쌓인 피로로 조금쯤 기운 없어보이는 걸 빼면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야. 무심코 말했더니 선하는 그저 웃고 만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고, 란씽은 현장에서 가져온 채집통을 보여줬다. 알록달록한 나비 여러 마리로, 유사이변이 의심되는 사건의 증거품이었다. 통 안을 들여다보는 선하의 표정이 부드럽다. 빨간색, 보라색, 검은색, 하늘색…….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어갈까요?"

 "응."



*



 란씽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자주 먹어서 익숙한 음식과 먹어보지 못해서 낯선 음식만이 있다. 요즘은 익숙한 음식 중에서도 간이 강한 음식을 고른다. 의식한 것은 아니고, 그것도 기억력 좋은 선하가 요즘은 그것만 먹네요, 하고 지적해줘서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평소에 거의 먹지 않던 만두탕을 골랐다. 란씽은 한 손으로 채집통과 수저를, 다른 한 손으로 만두탕을 들고 선하를 기다렸다. 접시 가득 샐러드를 담아온 선하가 란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지 그랬어요. 들고 있는 것도 많은데……."  



 말끝을 흐리는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란씽은 선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만두탕 그릇을 든 제 손이 있다. 만두가 먹고 싶은 걸까? 하지만 이런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란씽이 뒤늦게 눈치챘을 때, 선하는 어서 앉자고 말하며 앞서 걷고 있었다.



 "안 뜨거워. 괜찮아."

 "응, 알아요. 어서 와요. 국 다 식겠어."



 얼른 선하의 맞은 편에 앉으며 안색을 살피니,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는 선하가 웃는다. 예의 선한 미소로. 란씽은 이제, 그 표정을 안다. 그래서 뭐든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는 모른다. 괜찮다는 말보다 나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쉽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 이상 필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란씽은 생각했다.



 "란씽?"



 재촉을 받고, 마지못해 국을 뜨면서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



 증거물은 자기가 들고 올라갈 테니 이만 들어가 보라고, 선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란씽은 기어코 채집통을 건네주지 않았다. 승강기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침묵은 랩까지 이어졌다. 저녁 시간이었고, 랩 요원들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자리에 없었다. 채집통을 책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란씽의 일은 끝났다. 선하가 이제 들어갈 거냐고 물었고, 란씽은 고개만 내저었다. 대신 잠시 머뭇거리다 선하의 앞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식당 안에서 뜨거운 그릇을 들고 있었던 손이다. 선하는 말이 없었다. 란씽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조심해. 안 다치게."



 어렵사리 말하니, 선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두 손이 란씽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 쓸어내리고 어루만진다. 꾹 눌러보기도 한다. 마침내 빈틈없이 손가락끼리 꼭 얽은 선하가 란씽과 눈을 맞췄다. 



  "그런 생각을 해요. 가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건 어떤 느낌일까, 하고."



 바보 같죠, 그렇게 덧붙이는 선하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오히려 말문이 막혀, 란씽은 그냥 선하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귓가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간질거렸다.



*



 이변에게 초인종을 누르거나 미리 노크하는 정도의 친절함과 예의가 있다면, 아마 그중 하나는 선하의 몫일 것이다.

 소리는 불규칙했고, 선하는 그 알량한 노크가 들릴 때마다 괴로워했다. 어쩌면 매일, 어쩌면 격일로. 운이 좋으면 일주일 내내 잠잠할 때도 있었다. 간격이야 어찌 됐든 선하는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진 않았다. 란씽이 무작정 자료 서고 문을 부순 뒤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고, 이변적인 날씨도 몇 번은 더 있었으나, 선하가 먼저 란씽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혼자서 견뎌온 밤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란씽은 이해하고 있다. 다만 란씽 역시 오래간 선하를 지켜봐 왔고 그런 날의 선하는 평소와는 조금쯤 달랐기 때문에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서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었다. 선하의 허락을 구해 해가 뜨도록 그의 옆에 있었던. 손을 잡고, 뺨을 맞대고,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동이 틀 즈음, 선하는 란씽의 품 안에 잠이 들었다. 란씽은 땀으로 달라붙은 선하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빨갛게 짓무른 눈가를, 이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란씽으로선 무엇이 선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모른다.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종류다. 그 몫을 제가 대신 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 한들 선하가 원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이유는, 란씽 역시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란씽은 땀에 젖은 선하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블라인드 커튼 끝에 햇빛이 맺혔다. 






***

급 자료서고 찾아가는 로그랑 이어지는 느낌적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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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또다.

 란씽은 미간을 좁혔다. 빨갛게 물든 시야를 노려보며 안간힘을 썼으나 결과는 같았다. '나'는 도망치는데 실패했고, 크리쳐는 그런 '나'의 팔을 용서없이 뽑았다. 검게 흐려지는 '나'의 시야 구석에 어깨부터 뽑힌 팔이 기괴하게 덜렁거렸으나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뒤이어 익숙한 로딩화면이 깜박거린다. 란씽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선하가 눈을 둥글게 휘며 란씽을 보고 있었다.



 "이거 이상해."

 "이상해요?"

 "자꾸 죽어."

 "그거야, 방금 란씽이 벽으로 돌진했잖아요. 문으로 도망쳐야죠."

 "문 멀어. 벽 부수고 탈출하는게 빨라."



 그렇게 말하자 선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이 샜다.



 "잠깐, 란씽 잠깐만요……."



 그 사이 로딩이 끝나고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란씽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크리쳐를 만났고, 이번에도 벽에 비비적 거리다 붙잡혔다. 거보라는듯 선하를 돌아보니 아예 흐느끼다시피 웃고 있었다.



 "그런식으론 탈출 못해요."



 간신히 몸을 추스린 선하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아예 란씽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냐면 저 주인공 캐릭터는 란씽만큼 세지 않은걸. 기껏해야 저랑 비슷할거에요. ……아니, 저렇게 잘 뛰어다니는걸 보면 더 센가. 어쨌든 그걸 감안해서 피해야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게임에선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없으니까……."



 선하는 도망치고 숨는 요령에 대해 설명했다. 마냥 조근조근한 말씨로. 벌써 몇 번째 알려주는 건데도 질린 내색 하나 없는게 그저 신기했다. 참을성이 좋은 건지 가르치는데 능숙한 건지 란씽으로선 어느 한 쪽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앗, 시작했다. 란씽, 화면봐요, 화면."



 계속 얘기 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귀기울이는 새, 화면이 눈에 익은 장소로 바뀌었다. 힘내라며 응원해준 보람도 없이 이번에도 금방 죽어버렸다. 이번엔 크리쳐쪽으로 돌진해버린 탓이다. 선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란씽을 보았다. 란씽은 얼른 입을 열었다.



 "왼쪽 빈틈 있었어. 피할 수 있는데."



 소리내 말한 다음에야, 그리고 선하의 눈이 둥글게 휜 다음에야 그것이 변명처럼 들림을 깨달았다.




***

투-비-컨티뉴-

예정이었나노니(쓸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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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으로 알 수 있는 감각을 피부로 느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얼음은 차갑지 않고, 불은 뜨겁지 않고, 바늘은 따갑지 않고, 천은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그뿐이었다. 이변적이리만큼 다른 모든 것에 문제는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아직 살 수 있었다. 그럴 낯이 들었다.

 최근엔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만약 감각이 마비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천천히 진행됐더라면. 혹시, 한순간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면. 그뿐 만 아니다. ……란씽은 지나온 길을 되새기며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의 가정 또한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감성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 더욱 낯설다. 나쁘진 않다. 다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사실, 벌써 조금쯤 익숙해졌다.




 차갑게 젖어있던 손끝이 제 피부 위를 문대며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서로 나눠 가진 물기도 곧 버석 말랐다. 초점이 흐린 까만 눈은 한 곳에 고정된 채였고, 란씽은 젖은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이 저를 부드럽게 당겼다. 한없이 굼떴으나 란씽에게는 딱 알맞았다. 잠겨있던 눈과 똑바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 또한 하나의 초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은 보기보다 까칠했다. 조금 짠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목덜미를 끌었던 손이 턱 아래를 지나 뺨까지 올라왔다. 미지근한 숨이 살갗에 닿았다. 그것만이 있었다.

 감은 시야 속에 선하가 주는 감각 만이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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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하는 행동반경이 좁은 편이다. 대개가 랩, 조금 더 넓혀 수사국 내부와 그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다. 그런 그가 장시간 자리를 비우는 이유 역시 손에 꼽는다. 모 대학으로 출강을 나가거나, 무슨 회의 따위에 참석하거나, 아주 드물게 검진을 받거나 하는 정도. 선하는 어딨냐는 질문에 명확한 장소 대신 곤란한 표정이 돌아올 때도 있다. 오늘 그 대답을 돌려준 것은 민규였다. 오히려 되물었다. 어디 갔는지 아시냐면서. 아직 랩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게 오늘은 그만 퇴근해도 괜찮을 거라 조언해줄 사람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민규는 그저 하염없이 선하의 책상 맡을 맴돌던 모양으로, 여차하면 선하가 돌아올 때까지 밤새 기다릴 기세였다.




 "선하는 늦을 거야. 먼저 가."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절한 설명이 아님은 안다. 그러나 굳이 덧붙여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안다. 란씽은 다시 한 번 먼저 가, 라고 말해준 다음 랩을 나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잠시 들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아침에 보았던, 다소 지쳐 보이던 얼굴을 떠올린다. 마주친 시선에 마주 웃던 얼굴도 기억한다. 선하는 늘 그랬다. 여유가 있을 때의 그는 늘 괜찮았다. 비단 선하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안부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모범 답안 같은 것이었다. 당연하다. 이곳에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지난 몇 년간 많은 이변을 맞닥트리고 또 해결해왔다. 그런 경험 따위를 차곡차곡 쌓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변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간 만나온 많은 수의 이변이 그러했다. 란씽은 그럴 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흘려넘기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저 부딪칠 따름이다.

 선하는 부서진 문고리와 잠금장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바뀐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제야 란씽은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이 되었다.

 아직 하늘은 얌전한 척 시침을 떼고 있다. 란씽은 노크 대신 발소리로 저를 알렸다. 등 뒤로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잠겼다. 단조로운 전자음이 그렇게 요란할 수 없었다. 그만큼 조용한 밤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지나치자 몸을 잔뜩 옹송그린 선하가 있었다. 힘없이 고개 든 눈이 푹 잠겨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지금만큼은 필요하지 않았다. 란씽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손을 이끌어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손끝이 한참을 주춤거린 끝에 가볍게 뺨에 감겼다. 그래야만 란씽은 그 손등 위로 제 것을 겹칠 수 있었다.

 오늘도 긴 밤이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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