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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2.20  나는 감히 너를 원한다
  3. 2014.09.23  꿈의 끝
  4. 2014.09.06  시들어 지는 꽃
  5. 2014.08.10  사냥하는 주인
  6. 2014.07.15  이변의 잔흔
  7. 2014.07.06  탈피
  8. 2014.06.29  ((마저 이어쓰고 제목 붙인다고 우기는 변명))
  9. 2014.06.22  다음 날, 오전 열두 시 육 분
  10. 2014.06.02  고록 1




복합 커뮤니티 <중앙수사국 특수재난관리과: SPEDIS>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자캐커플책(BL)입니다.








 별다른 용건 없이, 그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찾아가도 되는 자리에 머무르게 된 것은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퇴근하기 전에 얼굴이나 볼까 싶어 랩으로 올라가는데,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누군가의 고함이 되었다. 격양된 어조가 빠르게 쏟아진다 싶더니, 쾅하는 소리를 끝으로 사무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이런 시간대에 사람이 남아있을 만한 곳은 몇 군데 없기에 불길한 생각이 자꾸 스멀스멀 떠올랐다.

 서둘러 복도 끝 모퉁이를 돌자, 설마 하던 루스가 막 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루스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고갯짓으로 인사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 그대로 쿵쾅거리며 란씽을 지나쳤다. 란씽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성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루스는 늘 무언가에 화가 나 있다. 그래서 모니터에 대고 총을 갈기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정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랩에서 나온 루스가 평소보다 더 격분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모쪼록 큰일이 아니면 좋으련만.

 유리문 너머를 힐끗 들여다보니 랩에는 선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늘 무언가를 질겅거리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고개가 떨구어진 바닥엔 서류뭉치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란씽이 랩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돌아선 얼굴이 스르르 녹았다.


 어서 와요. 일은 잘 마무리됐어요?”


 부드럽게 휜 눈에 피로가 비쳤다. 란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사람도 없어.”


 안색을 살피느라 한 박자 늦게 덧붙인 말에 선하가 조금 더 기쁜, 혹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종이다발을 내던지는 루스와 지친 듯 시선을 피하는 선하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 루스는 총을 꺼내 겨누기도 했고, 책상을 발로 되게 차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선하는 시위하듯 침묵하는 게 전부다. 상상 속에서나마 맞불 놓지 않는 건 지독히도 선하다웠지만, 정말 그런 식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입안이 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대답해줄 것 같진 않은데. 란씽이 고민하는 사이 선하가 먼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란씽과 시선을 맞추며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미끄러지듯, 선하의 손이 란씽의 목에 감겼다…….


 괜찮아?”


 랩인데. 속뜻을 읽은 선하가 빙긋 웃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제 올 사람도 없는걸.”


 그렇구나, 아무도 없으면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란씽은 한 손으로 선하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일전에 선하가 일러준 지침을 일부 수정했다. 아무도 없는 랩에서 해도 되는 것. 란씽을 가만 들여다보던 선하가 란씽의 손을 잡아끌어 제 허리 위에 올렸다.


 아니면, 서고로 갈까요?”


 나긋한 속삭임이 아주 가까이서 들려온다. 소리와 함께 뱉어진 숨이 턱 끝을 간질였다. 란씽은 대답 대신 선하의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벗겼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찰나가 지나고, 한쪽 다리가 접힌 안경이 선하의 랩 가운 주머니 안으로 떨어졌다.


*

샘플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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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었던거 같은 기억이 나니까 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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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제 어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없이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겨우 남아있는 기억조차 얼룩덜룩하게 빛바란 그림처럼 불완전했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다정했다고, 늘 링거 따위를 맞고있던 손등은 뼈밖에 남지 않아 앙상했다고. 품에 안기면 마른 햇빛 냄새가 났고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고. 머리를 쓸어내리고 뺨을 만지던 따스한 손가락, 어설프게나마 바늘을 잡고 만든 것에 과분할만큼 떨어지던 칭찬.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와 좋은 체격같이 작고 사소한 것 마저 자랑스러워 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 만큼 겹겹이 덧칠하고 기운 기억 속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던 강인함이라거나, 눈을 둥글게 휘며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어머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목구비 생김새 만큼은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망쳐놓은 그림처럼 뭉개진 채로 남은 것이다.

 또 언젠가는 한참동안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며 좋아라 말한 적이 있다. 입술을 다물고 있을때 둥글게 지는 언덕모양 호선마저 똑같다고 즐거이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어머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단언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이런 표정을 한 적은 없었다는 점 뿐이다. 단 한 번도.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먼 발치에 누군가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저 사람을 어머니라고 여겨도 좋은 걸까. 그렇다면 어머니같은 누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피니 무언가를 말하듯 오물거리고 있었다. 하도 먼 거리여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어쩐지 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샤오란, 샤오란, 하고. 이상하다. 란씽은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질척한 모래톱에 파묻힌 듯 사지가 묵직했다. 그래도 이를 악 물고 팔다리를 힘껏 당기며 한발짝씩 나아갔다. 땅을 박찬 발이 다시 바닥을 밟기까지 무던히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 초조한 마음에 아무리 고함쳐도 소리는 목 밖으로 터져나오지 않는다.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낯선 표정이 혀뿌리를 바짝바짝 타게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질책하는 듯, 슬픈 듯,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몸부림 끝에 간신히 손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다다랐다. 여전히 어머니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고, 이만큼 가까이 왔음에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란씽은 어머니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작고 둥근 어깨에 손끝이 스침과 동시에 닿은 곳이 검게 바스라졌다. 그것을 방아쇠로 어머니는 조각조각 흩어졌고, 그 잔해가 란씽을 덮쳤다. 란씽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눈 앞에 나타난 것은 활활 타오르는 고향집이었다. 불길은 집 전체를 집어 삼키고도 모자라 란씽을 향해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란씽은 망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이제 남은 가구, 물건 하나 없는 빈 집이었으나 불타 없어져도 좋을 곳은 아니었다. 어서 불을 꺼야한다는 생각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머뭇거리는새 란씽은 제 키만한 불길에 둘러쌓여있었다. 여전히 사지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말을 듣지 않았고, 뻘건 불길 너머로 지붕 끝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온 화기보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대로 불에 타죽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무력감이 온 몸을 지배했다. 이런 와중에도 왜인지,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란씽, 하고.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완전히 화염에 삼켜지고 나서야 착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따스한 온기, 익숙한 체취였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누군가에게.






 "선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것은 숨소리에 가까운 이름이었다. 선하가 허리를 숙이자 침대 시트가 부스럭거렸다. 란씽은 선하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고 선하는 식은땀이 흥건한 란씽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코 끝, 눈꺼풀, 뺨, 귀, 차례로 선하의 온기에 누그러졌다. 란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맞닿은 살갖으로 선하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하고. 벌컥거리는 제것과 달리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소리였다. 란씽은 선하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쿵, 쿵, 쿵. 그러면 말로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을 용케도 알아들어, 선하는 란씽의 머리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속삭인 소리에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다.



***


내남자가 내새끼 달래주는거 보고싶엇ㅅ더 내남자는 최고야

누구랑 같이 자본 기억이 없어서 저런 꿈 꿨을 때 누가 달래준 것도 처음이지 않을까 한다 천란씽이 우는 애였으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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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끝 :: 2014. 9. 23. 23:37 SPEDIS



꽃1피는1병으로 내남자를 앓는 천란씽이

마저 다 쓰고 백업하려구 했지만...일단...일단 백업할거야(쓸쓸


슾앤솔에 참가

그냥 올려두긴 심심하니까 샘플 분량이라도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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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 지는 꽃 :: 2014. 9. 6. 02:56 SPEDIS



수인 패러렐





 내 주인, 선하는 약하다.

 살도 근육도 없이 허여멀건하게 키만 쑥 커선 늘 풀조가리나 먹는다.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가끔 생선이나 한 토막 먹는다. 그렇게 먹으면서 사냥할 힘은 날까 싶어 내 몫을 조금 덜어주면, 왜인지 난처하게 웃는다. 그리곤 자긴 괜찮으니 많이 먹으라며 다시 내 앞으로 민다. 또 있다. 선하는 움직이기보단 앉아서 무얼 보는 게 더 즐거운 것 같다. 집에 있을 땐 늘 앉아서 그런 걸 본다. 번쩍거리는 기계상자나 종이나. (그것들이 나보다 더 재밌는 걸까?) 그래서 힘도 약하고 체력도 약하다. 선하랑 산책하러 나갈 때면 선하한테 맞춰 천천히 걷는다. 안 그럼 선하는 따라오지 못한다. 약해빠져선. 그래서 내가 선하를 지켜야한다. 선하는 약하니까. 

 그런데 요 며칠, 선하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다.

 선하가 한 번 사냥하러 나가면 한나절이 넘게 걸린다. 어떨 때는 운 좋게 해지기 전에 들어오고, 또 운이 나쁜 날이면 해가 지고도 한참을 더 있다 들어온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으레 저장해놓은 식사가 있다. 선하가 주인이 아니었다면 진작 내가 나섰을 만큼 느리다. 그런데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선하가 잠깐 사이에 사냥에 성공해 돌아온다. 밖이 캄캄한데도, 긴 바늘이 한 바퀴밖에 안 돌았는데도. 물론 간식거리 정도밖에 안 되는 양이지만,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장이다! 앞으로 더 능숙해지면 짧은 시간에 식사거릴 사냥해올 수 있을까? 그럼 지금보다 더 오래 놀 수 있을 텐데. 칭찬해주면 좀 더 열심히 하게 될까? 평소보다 더 많이 칭찬해주면 될까…….


*


 도어벨 소리에 거실 구석에 느른하게 누워있던 란씽이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왔다. 




 "란씽,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어? 간식 사왔는데. 먹을래?"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사온 살코기 통조림을 눈높이에서 흔들자 란씽이 눈을 동그랗게 뜨 선하와 통조림을 번갈아 보았다.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검은색 긴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렸다. 마음에 들었구나. 머리를 쓰다듬으니, 란씽은 눈을 끔뻑거리다 선하의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부볐다. 그리곤 손가락을 싹싹 핥는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까슬한 혀가 훑고 간 자리마다 뿌듯함이 소소하게 스몄다. 선하는 얼른 간식을 내려놓고 란씽을 꼭 끌어안았다. 어깨 위로 란씽이 머리를 비비는 감촉이 느껴진다. 가슴팍에 기분 좋은 목울림이 닿았다. 내일도 간식 사와야겠다고,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히이익 제목 히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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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하는 주인 :: 2014. 8. 10. 02:09 AU





 평소보다 어두운 아침이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고, 한낮이 되도록 도시는 재색 물안개로 흐렸다. 정오를 지나자 안개가 차츰 걷혀, 란씽이 막 파견 근무를 끝내고 수사국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하늘도 완전히 갠 뒤였다.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오늘의 날씨와 사건사고에 대해 말했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가시거리가 채 백 미터에 못 미칠 만큼 안개가 짙었고, 그만큼 사고도 사상자도 많은 이변적인 하루였다고. 

 란씽도 조금쯤 그런 하루였다.



 [선하, 저녁은?]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직이에요. 당신은?]

 [가고 있어. 같이 먹어.]

 [응. 도착하면 얘기해요.] 



 선하는 메세지 답장이 빠른 편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다. 오늘은 신호에 걸리는 사이사이 메세지를 보냈는데, 플립을 닫아 옆좌석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렸다. 도착하면 얘기하라는 메세지를 확인했을 땐 이미 수사국 주차장 안이었다. 주차장이야, 자판을 누르며 란씽은 선하가 일하는 틈틈이 제게 메세지를 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그럼 그걸로 좋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곧 내려간다는 답장이 왔다.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선하가 내려왔다. 다른 때 보다 잠이 부족한 날이었고, 낮동안 쌓인 피로로 조금쯤 기운 없어보이는 걸 빼면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야. 무심코 말했더니 선하는 그저 웃고 만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고, 란씽은 현장에서 가져온 채집통을 보여줬다. 알록달록한 나비 여러 마리로, 유사이변이 의심되는 사건의 증거품이었다. 통 안을 들여다보는 선하의 표정이 부드럽다. 빨간색, 보라색, 검은색, 하늘색…….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어갈까요?"

 "응."



*



 란씽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자주 먹어서 익숙한 음식과 먹어보지 못해서 낯선 음식만이 있다. 요즘은 익숙한 음식 중에서도 간이 강한 음식을 고른다. 의식한 것은 아니고, 그것도 기억력 좋은 선하가 요즘은 그것만 먹네요, 하고 지적해줘서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평소에 거의 먹지 않던 만두탕을 골랐다. 란씽은 한 손으로 채집통과 수저를, 다른 한 손으로 만두탕을 들고 선하를 기다렸다. 접시 가득 샐러드를 담아온 선하가 란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지 그랬어요. 들고 있는 것도 많은데……."  



 말끝을 흐리는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란씽은 선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만두탕 그릇을 든 제 손이 있다. 만두가 먹고 싶은 걸까? 하지만 이런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

 란씽이 뒤늦게 눈치챘을 때, 선하는 어서 앉자고 말하며 앞서 걷고 있었다.



 "안 뜨거워. 괜찮아."

 "응, 알아요. 어서 와요. 국 다 식겠어."



 얼른 선하의 맞은 편에 앉으며 안색을 살피니, 왜 그러냐는 듯 마주 보는 선하가 웃는다. 예의 선한 미소로. 란씽은 이제, 그 표정을 안다. 그래서 뭐든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는 모른다. 괜찮다는 말보다 나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쉽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 이상 필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란씽은 생각했다.



 "란씽?"



 재촉을 받고, 마지못해 국을 뜨면서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



 증거물은 자기가 들고 올라갈 테니 이만 들어가 보라고, 선하는 그렇게 말했지만 란씽은 기어코 채집통을 건네주지 않았다. 승강기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침묵은 랩까지 이어졌다. 저녁 시간이었고, 랩 요원들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자리에 없었다. 채집통을 책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란씽의 일은 끝났다. 선하가 이제 들어갈 거냐고 물었고, 란씽은 고개만 내저었다. 대신 잠시 머뭇거리다 선하의 앞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식당 안에서 뜨거운 그릇을 들고 있었던 손이다. 선하는 말이 없었다. 란씽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조심해. 안 다치게."



 어렵사리 말하니, 선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두 손이 란씽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 쓸어내리고 어루만진다. 꾹 눌러보기도 한다. 마침내 빈틈없이 손가락끼리 꼭 얽은 선하가 란씽과 눈을 맞췄다. 



  "그런 생각을 해요. 가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건 어떤 느낌일까, 하고."



 바보 같죠, 그렇게 덧붙이는 선하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많은 생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오히려 말문이 막혀, 란씽은 그냥 선하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귓가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간질거렸다.



*



 이변에게 초인종을 누르거나 미리 노크하는 정도의 친절함과 예의가 있다면, 아마 그중 하나는 선하의 몫일 것이다.

 소리는 불규칙했고, 선하는 그 알량한 노크가 들릴 때마다 괴로워했다. 어쩌면 매일, 어쩌면 격일로. 운이 좋으면 일주일 내내 잠잠할 때도 있었다. 간격이야 어찌 됐든 선하는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진 않았다. 란씽이 무작정 자료 서고 문을 부순 뒤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고, 이변적인 날씨도 몇 번은 더 있었으나, 선하가 먼저 란씽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혼자서 견뎌온 밤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란씽은 이해하고 있다. 다만 란씽 역시 오래간 선하를 지켜봐 왔고 그런 날의 선하는 평소와는 조금쯤 달랐기 때문에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서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었다. 선하의 허락을 구해 해가 뜨도록 그의 옆에 있었던. 손을 잡고, 뺨을 맞대고,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동이 틀 즈음, 선하는 란씽의 품 안에 잠이 들었다. 란씽은 땀으로 달라붙은 선하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빨갛게 짓무른 눈가를, 이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란씽으로선 무엇이 선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지 모른다.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종류다. 그 몫을 제가 대신 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 한들 선하가 원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이유는, 란씽 역시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란씽은 땀에 젖은 선하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블라인드 커튼 끝에 햇빛이 맺혔다. 






***

급 자료서고 찾아가는 로그랑 이어지는 느낌적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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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의 잔흔 :: 2014. 7. 15. 00:30 SPEDIS




 아버지는 어느 센티넬의 가이드였다. 당시 국가 소유의 센티넬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자로, 그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한다. 아버지는 십여 년을 그녀의 가이드로 살았고, 아마, 그녀를 덮친 불운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녀의 가이드로 곁에 남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센티넬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떻게 희생했는지, 센티넬을 잃은 뒤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따위를. 언젠가 너 역시 겪을 일이라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저 전해 듣기만 한 과거의 아버지와 앞으로 올 제 미래가 쉬이 그려지지 않았던 것도 기억한다. 

 어머니는 센티넬을 잃고 망가진 아버지를 지킨 단 한 사람이었다. 

 센티넬도 가이드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 앞에 슬리퍼 한 쌍이 흐트러져 있는걸로 보아, 또 급한 호출로 집을 비운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불시에 불려 나간 날의 선하는 으레 한계까지 혹사당하곤 했다. 평소라고 설렁설렁 일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선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쥐어짜댔다. 그들이라고 센티넬이 감당할 후폭풍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센티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같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기에 그까짓 것은 아무래도 좋을테지.  

 언제쯤 불려나간 걸까.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을까. 마중 나가도 괜찮을까? 아니, 부르기 전에는 오지 말라고 했던가. 물건을 떠넘기듯 선하의 어깨를 밀던 누군가가 한 말을 기억한다.

 

 '가이드 주제 건방지게.'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란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오는 대로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옷을 벗으려다, 이곳이 주인이 자릴 비운 남의 집이라고 깨닫는다. 집에 돌아온 선하가 그런 저를 어떻게 생각할 지. 아마 폭주하는 선하에게 그런 사소한 걸 신경쓸 여력은 없을테지만,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란씽은 얼른 옷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소파에 바르게 앉았다. 큼큼, 멋쩍은 헛기침을 마지막으로 집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주인이 없는 집은 평소보다 조금 더 휑하다. 란씽은 거실을 쓱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취미도, 특기도 없는 선하는 꼭 필요한 세간만 간소하게 두었다. 좋게 말하면 정갈하고, 나쁘게 말하면 삭막하다. 눈 닿는 곳마다 보이는 서류더미나 파일철마저 없었다면 아예 사람 사는 곳 같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하에겐 정말 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선하를 불행하게 한다. 란씽은 그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어디까지 간섭해도 좋을지 재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 떠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끊어내듯, 얌전히 앉았던 란씽이 일어났다. 

빈집을 멋대로 둘러보는 건 실례지만, 눈에 보이는 걸 구경하는 정도는 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봐도 모르는 것투성이라 금세 흥미를 잃겠지만. 란씽은 느긋이 걸음을 뗐다.




***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웃도는 센티넬이나,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뭍으로 나온 물고기만 못했다. 가이드는 센티넬의 산소이자 옷이며 끼니였다. 듣자니, 어떤 센티넬은 가이드를 제집에 감금하다시피 험하게 취급한다고 한다. 모든 가이드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나, 어떤 짓을 하든 암암리에 용납되고 또 제지받지 않는 것이 센티넬이다.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명목 아래 그랬다. 

 뛰어난 센티넬의 가이드이기 때문에, 그 센티넬이 한 나라의 앞날을 쥐고 흔드는 선하이기 때문에. 란씽에게는 다른 가이드보다 많은 제약이 따른다. 란씽은, 그 모든 것이 가이드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아버지처럼 센티넬을 잃고 괴로워하느니 그편이 차라리 낫다고. 

 다행히 선하는 저를 바쳐 지켜낼 가치가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선하를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란씽이 보고 느낀 선하는 그랬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많은 걸 할 수 있고, 또 그런 위치임에도 다른 이를 배려하기가 자연스럽다거나, 자신을 숨기는데 익숙하다거나. 그 정도 뿐이다. 란씽은 선하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까지는 모른다. 다만 들려오는 이야기로,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 짐작할 뿐이었다. 일 관련해 선하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보다 채선하라는 사람의 본질적인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관심 없던 것들이 조금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재였다. 안쪽에 있는 책상 제일 위에 놓인 사진 몇 장, 그 아래로 글자가 빼곡한 종이가 흩어져있었다. 서류 사이사이로 비슷한 사진들이 섞여 있다. 발치에도 몇 장 정도가 채였다. 그만큼 어수선 했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사진 한 장을 집었다. 사진 속에는 어느날인가의 제 모습이 있었다. 모든 사진, 모든 종이가 그랬다. 어디에든 란씽에 관한 것이 담겨 있었다. 란씽은 종이에 그려진, 적힌 것들을 빠르게 읽었다.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란씽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손에 쥔 사진을 놓지 못했다. 무슨 낯으로 선하를 봐야할 지 몰랐다. 그렇게 허둥거리다 서고에 들어온 선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란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변명조차 입에 담을 새 없이, 선하가 입을 열었고. 란씽은 깨달았다…….




***




 선하는 몸을 채 가누지 못하면서도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란씽은 선하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옷 밖으로 드러난 모든 맨살에 입을 맞추며 묵묵히 들었다. 이윽고 빽빽한 단어가 드문드문 호흡에 먹혀든 뒤에야 선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는 숨이 아직 불안정했다. 옷자락을 움켜쥔 선하의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란씽은 몇 번이고 키스했다. 그럼 갑갑했던 모든 것이 조금쯤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선하의 앞에서 복잡한 생각은 아무 쓸모 없었다. 맞닿은 살, 미지근한 온기만이 전부였다. 그런 사이였다.

 이런 식으로 알지 못했다면 평생 혼자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들키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얌전히 기다렸더라면. 그런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제가 알고 싶었던 선하가 있다. 저를 끔찍히 아끼는 선하가. 그럼에도 란씽은 기쁘지 않았다. 흐느끼는 선하를 힘줘 끌어안으며, 란씽은 어머니가 들려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렴풋 가늠할 뿐이었던 그 윤곽이 보였다. 센티넬에게 가이드가 어떤 의미인지, 센티넬과 각인한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이제야 비로소 실감했다.




 네가 센티넬이 아니었다면, 내가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지금 같은 모습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분명 너를 좋아하게 됐을 텐데.

 하지만 가이드가 아닌 나는, 너한테 이토록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없을 텐데.




 굳이 소리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의 선하는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란씽은 그런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선하가 저를 좋아하는 감정과 제가 선하를 좋아하는 감정은 비슷한 종류일 지 모른다. 아주 겹치지 않는 종류일 수도 있다. 섯불리 확실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선하에게 좋아한다 대답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받는 사랑에 돌려주기엔 너무나 비겁한 마음이었다. 아마, 선하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모르는 척 입을 다물 것이다. 

 막 싹을 틔우고 나온 감정을 짓밟으며, 란씽은 눈을 떴다. 그리고 지쳐 늘어진 선하를 조심스레 고쳐안고 서고를 나왔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어울리는 장소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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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 :: 2014. 7. 6. 19:30 AU





 아. 또다.

 란씽은 미간을 좁혔다. 빨갛게 물든 시야를 노려보며 안간힘을 썼으나 결과는 같았다. '나'는 도망치는데 실패했고, 크리쳐는 그런 '나'의 팔을 용서없이 뽑았다. 검게 흐려지는 '나'의 시야 구석에 어깨부터 뽑힌 팔이 기괴하게 덜렁거렸으나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뒤이어 익숙한 로딩화면이 깜박거린다. 란씽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선하가 눈을 둥글게 휘며 란씽을 보고 있었다.



 "이거 이상해."

 "이상해요?"

 "자꾸 죽어."

 "그거야, 방금 란씽이 벽으로 돌진했잖아요. 문으로 도망쳐야죠."

 "문 멀어. 벽 부수고 탈출하는게 빨라."



 그렇게 말하자 선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이 샜다.



 "잠깐, 란씽 잠깐만요……."



 그 사이 로딩이 끝나고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란씽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크리쳐를 만났고, 이번에도 벽에 비비적 거리다 붙잡혔다. 거보라는듯 선하를 돌아보니 아예 흐느끼다시피 웃고 있었다.



 "그런식으론 탈출 못해요."



 간신히 몸을 추스린 선하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아예 란씽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냐면 저 주인공 캐릭터는 란씽만큼 세지 않은걸. 기껏해야 저랑 비슷할거에요. ……아니, 저렇게 잘 뛰어다니는걸 보면 더 센가. 어쨌든 그걸 감안해서 피해야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게임에선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없으니까……."



 선하는 도망치고 숨는 요령에 대해 설명했다. 마냥 조근조근한 말씨로. 벌써 몇 번째 알려주는 건데도 질린 내색 하나 없는게 그저 신기했다. 참을성이 좋은 건지 가르치는데 능숙한 건지 란씽으로선 어느 한 쪽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앗, 시작했다. 란씽, 화면봐요, 화면."



 계속 얘기 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귀기울이는 새, 화면이 눈에 익은 장소로 바뀌었다. 힘내라며 응원해준 보람도 없이 이번에도 금방 죽어버렸다. 이번엔 크리쳐쪽으로 돌진해버린 탓이다. 선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란씽을 보았다. 란씽은 얼른 입을 열었다.



 "왼쪽 빈틈 있었어. 피할 수 있는데."



 소리내 말한 다음에야, 그리고 선하의 눈이 둥글게 휜 다음에야 그것이 변명처럼 들림을 깨달았다.




***

투-비-컨티뉴-

예정이었나노니(쓸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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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으로 알 수 있는 감각을 피부로 느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얼음은 차갑지 않고, 불은 뜨겁지 않고, 바늘은 따갑지 않고, 천은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그뿐이었다. 이변적이리만큼 다른 모든 것에 문제는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아직 살 수 있었다. 그럴 낯이 들었다.

 최근엔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만약 감각이 마비되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천천히 진행됐더라면. 혹시, 한순간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면. 그뿐 만 아니다. ……란씽은 지나온 길을 되새기며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의 가정 또한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감성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 더욱 낯설다. 나쁘진 않다. 다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사실, 벌써 조금쯤 익숙해졌다.




 차갑게 젖어있던 손끝이 제 피부 위를 문대며 미지근하게 데워졌다. 서로 나눠 가진 물기도 곧 버석 말랐다. 초점이 흐린 까만 눈은 한 곳에 고정된 채였고, 란씽은 젖은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이 저를 부드럽게 당겼다. 한없이 굼떴으나 란씽에게는 딱 알맞았다. 잠겨있던 눈과 똑바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 또한 하나의 초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은 보기보다 까칠했다. 조금 짠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목덜미를 끌었던 손이 턱 아래를 지나 뺨까지 올라왔다. 미지근한 숨이 살갗에 닿았다. 그것만이 있었다.

 감은 시야 속에 선하가 주는 감각 만이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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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난날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원인불명의 뇌사였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며, 거듭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란씽은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늘 어딘가 아팠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은 날도 침대맡에서 뜨개질하거나 수를 놓는 것이 고작인 체력이었다. 그 깨지기 쉬운 여린 몸이 살기엔 많은 약과 치료가 필요했다. 작은 문파 관장이 감당하기엔 턱없이 큰 구멍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긴 시간 병원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한 채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까지.

 이번엔 제 차례였다. 란씽은 묵묵히 밑 빠진 독에 돈을 길어 넣었다. 

 스물 남짓,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리라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다행히 란씽은 남다른 몸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수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열량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을 모두 쏟아도 하루씩 숨을 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얕은 목숨을 붙잡아 놓던 것은 최첨단 의료기술도, 의사의 진단도 간호사의 보살핌도 아닌, 손바닥만 한 산소 호흡기였다.

 뇌사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기까지 사 년이 걸렸다. 란씽은 제 손으로 호흡기를 떼었다. 남은 것은 페널티로 병든 몸뚱이 뿐이었다.

 호흡기를 떼던 그 날, 한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들었던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사라지기는커녕 끊임없이 새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죄책감이었다. 그만큼 숨 쉬듯 익숙한 감정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잠시를 넘기면 어떻게든 다시 괜찮아졌다. 

 ……지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란씽은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내부를 쓱 훑었다. 그리고 저편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을 불렀다.

 





2. 


 특수능력이 몸 깊숙이 스며들어 변한 것이 몇 있다. 시력이 좋아지고, 체력이 늘고, 정교한 작업이 능숙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리고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게 된 것 정도.




 "안주가 좀 남았네요."




 란씽은 그제야 안주보다 술이 많았다고 눈치챘다.




 "술을 더 시켜야 하나?"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은 그만큼 썩 멀쩡해 보였다. 하긴 자기 관리에 능한 선하가 어디까지 술이 차는 줄도 모르고 막 들이키지는 않았을 거다.




 "있잖아요, 란씽. 전……. 히어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저였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에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안에 담은 것을 꺼내는 얼굴에 취기가 묻어났다. 선하는 조금, 어쩌면 많이 지쳐 보였다.


 토미가 그렇게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는 만화나 게임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굳이 따진다면, 어떻게든 이변으로부터 하늘을 지탱하는 특수관리과가 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깎아가며 지켜야 하는 자리였다. 부서의 모든 요원이, 한때 함께했던 동료들 역시 그렇게 하루하루 일했다. 

 란씽은 늘 그 단어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이름을 가지기엔 그간 걸어온 길이 올곧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속죄나 간신히 하며 사는 처지다. 영웅이 가져야 할 자격이, 제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선하의 가슴을 이보다 더 무겁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너 역시 히어로라는 말도, 선하에게는 쓸모없다는 것을 안다. 

 대신 바닥을 드러낸 잔에 술을 권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으나,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로 한동안은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한가한가 싶으면 날씨가 궂었고, 모처럼 하늘이 개면 일이 밀어닥쳤다.

 휴가계를 수리하러 잠시 수사국에 들렀던 어느 날, 란씽은 지나가던 길에 잠시 닫힌 서고 앞에 멈췄다. 한 번도 문고리를 잡아 돌린 적은 없으나, 잠겨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썩 도움되는 것은 없었다. 대신, 그렇다고 정말 안 올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 떨 바텐더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니 조금쯤 괜찮아진다. 기억해둬야겠다. 우스갯소리로 괜찮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늘 그랬듯,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발소리를 죽인 보람도 없이 먼 하늘에서 우레가 연달아 울었다.





3.


 부쩍 지독한 꿈을 자주 꾼다. 페널티가 악몽으로 변한 게 아닐까, 갈비뼈 아래서 요동치는 통증만 없었다면 제법 그럴싸한 가설이다. 란씽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의식이 들었을 즈음부터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눈가를 간질이는 통에 영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지 못한 건 오랜만이다. 하루쯤은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하루쯤은, 같은 변명이 얼마나 몸을 나태하게 하는 지 안다. 시계를 확인하니 생각만큼 늦진 않았다. 다섯 시를 조금 넘겨, 아직 해가 뜰 리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변이겠거니 여기며 창밖을 보았을 때, 란씽은 그제야 창문 밖의 그것이 햇빛이 아님을 깨달았다.



 특수재난관리과 5년 차, 슬슬 이변이 해결해야 할 사건으로 더 익숙한 시기였다. 그 말은 즉, 모든 이변을 해결할 자신감은 없더라도 웬만한 것으론 새삼스레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의 기상 이변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계절에 맞지 않는 것이 내린다거나, 밤에 해가 뜨고 낮에 달이 뜨는 정도가 아니었다. 세계의 끝, 란씽의 감상은 그랬다.


 새파란 하늘 가득 녹색으로 빛나는 것이 차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름 같다가도,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처럼 흔들리고, 또 꿈틀거리는 뱀처럼 뒤틀렸다. 그렇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떠밀리며 모습을 바꾼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느낀 것은 경이 따위가 아니었다. 갈수록 많은 것에 무감각해지는 란씽으로선 꽤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기도 했다.

 란씽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말아쥔 주먹 위로 심장이 벌컥거렸다.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숨을 꾹 참고 견디면 대개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로 수그러든다. 늘상 있는 일이고 그만큼 익숙하다, 그러니까…….

 아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눈앞에 닥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다.

 란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4.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좁디좁은 인맥 중에도 란씽의 페널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프로페서 닉, 윌리엄, 루시나 가까운 시니어 몇 명, 어떻게 알아냈는진 몰라도 줄리엣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물론 그녀에게 말한 적은 없다. 애초에 자처해 안에 든 것을 토로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대상이 그 여자라면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줄리엣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란씽이 일하는 곳, 취미, 교우 관계, 자주 가는 술집이나 식당같이 시시콜콜한 것부터 제가 보내는 녹색 보석들이 란씽에겐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생각 역시 그랬다.




 "자긴 그걸로 괜찮아?"




 그녀, 줄리엣은 어느 날부턴가 뻔뻔할 만큼 빈번히 란씽의 집으로 찾아왔다. 란씽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제집처럼 빈둥거릴 때도, 다녀간 흔적만 남길 때도 있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와서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있다. 확실히 좀처럼 사람을 들이지 않는 현직 수사관의 집이란 도둑이 숨기엔 알맞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 날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그 일이 그렇게 좋아? 죽어가면서도 못 그만둘 만큼? 아니잖아."




 란씽을 올려다보는 녹빛 눈동자가 사뭇 진지했다. 란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변에 너무 익숙해져서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내일 당장 산소가 없어진다거나,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거 같아?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해? 하늘이? 땅이? 신이? ……아니야, 천란씽씨. 이런 세상에 그렇게 꾹꾹 참으면서 살면 누가 알아주냐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미련하게. 자긴 지금 당장 죽어도 미련하게 참았던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궤변이다. 

 저 길거리의 많은 비관론자가 그러듯, 사이비 종교 교주가 부르짖듯 우리의 세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끝장난다느니,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니 말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말하는 세계의 끝이 당장 내일인지, 혹은 십 년후, 이십 년 후가 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건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듯, 불투명한 미래를 들여다볼 수도 없는 일이다. 

 감정이란 것은 판단을 기대기엔 무척이나 애매하다. 정의하기 어렵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다스리지 못한 감정은 폭력적으로 이성을 좀 먹는다. 순간의 감정을 따라서 좋았던 일은 결코 없었다. 치솟는 분노를 감당 못해 일을 낸 적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나서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 결심했다. 란씽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감정에 겨워 휘둘리는 사람 역시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면한 것에 눈 돌릴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 때문이기도, 갈수록 느끼는 감정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가르침 역시 한몫했다. 참고 견뎌라, 행하는 것은 확신이 선 다음이다. 몸으로 배운 것이니만큼 쉬이 잊어버리지 않고 따르며 살았다 자신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 모든 걸 허물만큼, 란씽은 나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호히 대답했다.




 "안 해."





5.


 ……그랬을 텐데.

 이토록 충실하리만치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도 오랜만이다. 땀방울이 맺히도록 달린 것 또한. 굳게 잠긴 문 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정상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보기 드문 기상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제가 보지 못한 종류였을 뿐. 실제로 하늘 위로 번쩍거리는 것은 단지 그뿐, 지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렇게 호들갑 떨며 달려올 일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괜히 머쓱해 어찌할 줄 몰라, 뜨끈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신 차렸으면 그걸로 됐다. 이제 아무 일 없는 척 돌아가면 그만이다. 늘 그랬듯 체력 단련실에서 수련하고, 아침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면 된다. 란씽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다리가 무겁기만 한지. 벌컥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마치 저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이런 종류의 충동을, 제 안의 소리를 얼마든지 흘려내며 살아왔다. 지금도 못할 건 없다.

 내키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다시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이.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있다. 란씽의 죄책감이, 특수 능력의 페널티가 그렇다. 잠긴 문 앞에 란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아닌 척 그곳을 떠나는 일뿐이었다. 도울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그가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첩장을 받고 나서야, 란씽은 선하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적인 종류의 일까지 관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려던 선하가 외출하는 걸 별일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선약이 있다던 그때 넌지시 물었다면 좋았을까? 란씽은 불쾌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오래도 가졌으나 모르는 척 눈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찌 됐건 결혼하는 동료에게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견뎌야 할 죄책감이 하나 더, 목 아래를 묵직이 짓눌렀다. 

 이후로 썩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혼 소식을 들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괴롭힌 모든 괴로운 것이 그러했듯, 모르는 척 숨죽여 견디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 느낀 불쾌함은 조금도 엷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한 번도 그 존재감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막 일어났을 때, 이변을 목도한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단 하나를. 이번만큼은 감정에 휩쓸려도 좋았다. 

 결심이 섰다면 움직일 뿐이다. 란씽은 눈을 떴다. 문고리를 가볍게 돌려 당기자 반대편 손잡이까지 한꺼번에 뜯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영원히 닫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료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6.


 자료 서고 안은 생각보다 어둡고 조용했다. 케케묵은 먼지와 숨죽인 정적, 블라인드 커튼 너머로 이따금 새어드는 빛만이 있었다. 잠시 바닥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지켜보던 란씽이 걸음을 옮겼다. 일정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책장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다. 

 높은 책장을 몇 개나 지나친 자료 서고의 끝, 가장 깊은 구석에 익숙한 뒷모습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책이나 서류 따위가 뒤죽박죽 흩어져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 요란한 소리는 이것이었을까. 란씽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선하."




 그리고 불렀다.

 안으로 옹송그린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갑……, 자기 무슨 일이에요?"




 오랜 침묵을 깨고, 이윽고 선하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란씽을 등진 채였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미리 연락 줬음 좋았을 텐데. ……참 그렇지, 휴대폰을 꺼놓은 거 같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아, 지금 몇 시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 이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있어요."




 푹 잠긴 목으로 횡설수설하는 한편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분주히 긁어모았다. 숙인 고개 아래 표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이 닿지 않았던 곳을 억지로 짓밟고 들어온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만큼은 잠시 모른 척 눈 감기로 했다.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사방을 더듬던 두 팔이 멎었다. 또 한 발짝, 이번엔 열 손가락이 뻣뻣하게 오므라졌다. 한 발짝, 잔뜩 힘 준 손이 파르르 떨린다. 마지막 한 발짝 정도의 간격을 둔 뒤에야 멈췄다. 둥글게 굽은 등은 한 눈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보였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야." 




 란씽은 그 등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다치게 한 적 있어. 영영 못걷게 만든 적도 있어. 아버지를 죽게 두었어. 내 페널티는 그 속죄야. 내가 견뎌야 해."




 마침내 선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날, 조금이나마 속내를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란씽은 짓무른 눈가를 닦아주기보다 그 앞에 무릎 굽혀 시선을 맞추길 택했다. 




 "이건 선하 몫. 알아. 그래도 당연한 건 아니야. 그래서 곁에 있고 싶었어. 계속."




 시작은 확실하지 않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묻어야 했다. 선한 얼굴, 모나지 않은 성격, 좋은 머리와 깊은 지식, 뼈가 도드라진 발목, 뭐든 질겅거리는 아이 같은 버릇, 가끔 짓는 조마조마한 표정, 그 어떤 점에 이끌렸는지조차 란씽은 모른다.




 "선하."




 다만 확실한 것은 미련하게도 돌아서 온 마음이었다.




 "좋아해."






***

다시 읽기가 두렵다 눈이 고통받는다 도륵 도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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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록 :: 2014. 6. 2. 02:30 SPED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