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SPEDIS'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6.02  고록 1
  2. 2014.03.13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3. 2014.02.27  S2M1, Morning Bus No.91 #party A
  4. 2013.11.10  SS2 천란씽 시트
  5. 2012.10.12  ((제목 뭘로할지 고민하는 문장))




1.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난날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원인불명의 뇌사였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며, 거듭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란씽은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늘 어딘가 아팠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은 날도 침대맡에서 뜨개질하거나 수를 놓는 것이 고작인 체력이었다. 그 깨지기 쉬운 여린 몸이 살기엔 많은 약과 치료가 필요했다. 작은 문파 관장이 감당하기엔 턱없이 큰 구멍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긴 시간 병원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한 채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까지.

 이번엔 제 차례였다. 란씽은 묵묵히 밑 빠진 독에 돈을 길어 넣었다. 

 스물 남짓,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리라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었다.



 다행히 란씽은 남다른 몸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수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열량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을 모두 쏟아도 하루씩 숨을 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얕은 목숨을 붙잡아 놓던 것은 최첨단 의료기술도, 의사의 진단도 간호사의 보살핌도 아닌, 손바닥만 한 산소 호흡기였다.

 뇌사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기까지 사 년이 걸렸다. 란씽은 제 손으로 호흡기를 떼었다. 남은 것은 페널티로 병든 몸뚱이 뿐이었다.

 호흡기를 떼던 그 날, 한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들었던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사라지기는커녕 끊임없이 새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죄책감이었다. 그만큼 숨 쉬듯 익숙한 감정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잠시를 넘기면 어떻게든 다시 괜찮아졌다. 

 ……지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란씽은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내부를 쓱 훑었다. 그리고 저편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을 불렀다.

 





2. 


 특수능력이 몸 깊숙이 스며들어 변한 것이 몇 있다. 시력이 좋아지고, 체력이 늘고, 정교한 작업이 능숙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리고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게 된 것 정도.




 "안주가 좀 남았네요."




 란씽은 그제야 안주보다 술이 많았다고 눈치챘다.




 "술을 더 시켜야 하나?"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은 그만큼 썩 멀쩡해 보였다. 하긴 자기 관리에 능한 선하가 어디까지 술이 차는 줄도 모르고 막 들이키지는 않았을 거다.




 "있잖아요, 란씽. 전……. 히어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저였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에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안에 담은 것을 꺼내는 얼굴에 취기가 묻어났다. 선하는 조금, 어쩌면 많이 지쳐 보였다.


 토미가 그렇게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는 만화나 게임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굳이 따진다면, 어떻게든 이변으로부터 하늘을 지탱하는 특수관리과가 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깎아가며 지켜야 하는 자리였다. 부서의 모든 요원이, 한때 함께했던 동료들 역시 그렇게 하루하루 일했다. 

 란씽은 늘 그 단어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이름을 가지기엔 그간 걸어온 길이 올곧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속죄나 간신히 하며 사는 처지다. 영웅이 가져야 할 자격이, 제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선하의 가슴을 이보다 더 무겁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너 역시 히어로라는 말도, 선하에게는 쓸모없다는 것을 안다. 

 대신 바닥을 드러낸 잔에 술을 권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으나,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로 한동안은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한가한가 싶으면 날씨가 궂었고, 모처럼 하늘이 개면 일이 밀어닥쳤다.

 휴가계를 수리하러 잠시 수사국에 들렀던 어느 날, 란씽은 지나가던 길에 잠시 닫힌 서고 앞에 멈췄다. 한 번도 문고리를 잡아 돌린 적은 없으나, 잠겨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썩 도움되는 것은 없었다. 대신, 그렇다고 정말 안 올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 떨 바텐더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니 조금쯤 괜찮아진다. 기억해둬야겠다. 우스갯소리로 괜찮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늘 그랬듯,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발소리를 죽인 보람도 없이 먼 하늘에서 우레가 연달아 울었다.





3.


 부쩍 지독한 꿈을 자주 꾼다. 페널티가 악몽으로 변한 게 아닐까, 갈비뼈 아래서 요동치는 통증만 없었다면 제법 그럴싸한 가설이다. 란씽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의식이 들었을 즈음부터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눈가를 간질이는 통에 영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지 못한 건 오랜만이다. 하루쯤은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하루쯤은, 같은 변명이 얼마나 몸을 나태하게 하는 지 안다. 시계를 확인하니 생각만큼 늦진 않았다. 다섯 시를 조금 넘겨, 아직 해가 뜰 리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변이겠거니 여기며 창밖을 보았을 때, 란씽은 그제야 창문 밖의 그것이 햇빛이 아님을 깨달았다.



 특수재난관리과 5년 차, 슬슬 이변이 해결해야 할 사건으로 더 익숙한 시기였다. 그 말은 즉, 모든 이변을 해결할 자신감은 없더라도 웬만한 것으론 새삼스레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의 기상 이변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계절에 맞지 않는 것이 내린다거나, 밤에 해가 뜨고 낮에 달이 뜨는 정도가 아니었다. 세계의 끝, 란씽의 감상은 그랬다.


 새파란 하늘 가득 녹색으로 빛나는 것이 차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름 같다가도,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처럼 흔들리고, 또 꿈틀거리는 뱀처럼 뒤틀렸다. 그렇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떠밀리며 모습을 바꾼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느낀 것은 경이 따위가 아니었다. 갈수록 많은 것에 무감각해지는 란씽으로선 꽤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기도 했다.

 란씽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말아쥔 주먹 위로 심장이 벌컥거렸다.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숨을 꾹 참고 견디면 대개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로 수그러든다. 늘상 있는 일이고 그만큼 익숙하다, 그러니까…….

 아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눈앞에 닥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다.

 란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4.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좁디좁은 인맥 중에도 란씽의 페널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프로페서 닉, 윌리엄, 루시나 가까운 시니어 몇 명, 어떻게 알아냈는진 몰라도 줄리엣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물론 그녀에게 말한 적은 없다. 애초에 자처해 안에 든 것을 토로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대상이 그 여자라면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줄리엣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란씽이 일하는 곳, 취미, 교우 관계, 자주 가는 술집이나 식당같이 시시콜콜한 것부터 제가 보내는 녹색 보석들이 란씽에겐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생각 역시 그랬다.




 "자긴 그걸로 괜찮아?"




 그녀, 줄리엣은 어느 날부턴가 뻔뻔할 만큼 빈번히 란씽의 집으로 찾아왔다. 란씽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제집처럼 빈둥거릴 때도, 다녀간 흔적만 남길 때도 있었다.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와서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있다. 확실히 좀처럼 사람을 들이지 않는 현직 수사관의 집이란 도둑이 숨기엔 알맞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 날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그 일이 그렇게 좋아? 죽어가면서도 못 그만둘 만큼? 아니잖아."




 란씽을 올려다보는 녹빛 눈동자가 사뭇 진지했다. 란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변에 너무 익숙해져서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내일 당장 산소가 없어진다거나,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거 같아?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해? 하늘이? 땅이? 신이? ……아니야, 천란씽씨. 이런 세상에 그렇게 꾹꾹 참으면서 살면 누가 알아주냐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미련하게. 자긴 지금 당장 죽어도 미련하게 참았던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궤변이다. 

 저 길거리의 많은 비관론자가 그러듯, 사이비 종교 교주가 부르짖듯 우리의 세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 당장 끝장난다느니,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니 말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말하는 세계의 끝이 당장 내일인지, 혹은 십 년후, 이십 년 후가 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건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듯, 불투명한 미래를 들여다볼 수도 없는 일이다. 

 감정이란 것은 판단을 기대기엔 무척이나 애매하다. 정의하기 어렵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다스리지 못한 감정은 폭력적으로 이성을 좀 먹는다. 순간의 감정을 따라서 좋았던 일은 결코 없었다. 치솟는 분노를 감당 못해 일을 낸 적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나서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 결심했다. 란씽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감정에 겨워 휘둘리는 사람 역시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면한 것에 눈 돌릴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 때문이기도, 갈수록 느끼는 감정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가르침 역시 한몫했다. 참고 견뎌라, 행하는 것은 확신이 선 다음이다. 몸으로 배운 것이니만큼 쉬이 잊어버리지 않고 따르며 살았다 자신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 모든 걸 허물만큼, 란씽은 나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호히 대답했다.




 "안 해."





5.


 ……그랬을 텐데.

 이토록 충실하리만치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도 오랜만이다. 땀방울이 맺히도록 달린 것 또한. 굳게 잠긴 문 앞에 다다라서야 겨우 정상적인 사고가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보기 드문 기상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제가 보지 못한 종류였을 뿐. 실제로 하늘 위로 번쩍거리는 것은 단지 그뿐, 지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렇게 호들갑 떨며 달려올 일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가 괜히 머쓱해 어찌할 줄 몰라, 뜨끈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신 차렸으면 그걸로 됐다. 이제 아무 일 없는 척 돌아가면 그만이다. 늘 그랬듯 체력 단련실에서 수련하고, 아침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면 된다. 란씽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다리가 무겁기만 한지. 벌컥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마치 저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이런 종류의 충동을, 제 안의 소리를 얼마든지 흘려내며 살아왔다. 지금도 못할 건 없다.

 내키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다시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이.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있다. 란씽의 죄책감이, 특수 능력의 페널티가 그렇다. 잠긴 문 앞에 란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아닌 척 그곳을 떠나는 일뿐이었다. 도울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그가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첩장을 받고 나서야, 란씽은 선하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적인 종류의 일까지 관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려던 선하가 외출하는 걸 별일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선약이 있다던 그때 넌지시 물었다면 좋았을까? 란씽은 불쾌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오래도 가졌으나 모르는 척 눈 감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찌 됐건 결혼하는 동료에게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견뎌야 할 죄책감이 하나 더, 목 아래를 묵직이 짓눌렀다. 

 이후로 썩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혼 소식을 들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괴롭힌 모든 괴로운 것이 그러했듯, 모르는 척 숨죽여 견디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 느낀 불쾌함은 조금도 엷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한 번도 그 존재감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막 일어났을 때, 이변을 목도한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단 하나를. 이번만큼은 감정에 휩쓸려도 좋았다. 

 결심이 섰다면 움직일 뿐이다. 란씽은 눈을 떴다. 문고리를 가볍게 돌려 당기자 반대편 손잡이까지 한꺼번에 뜯어져 나왔다. 그것만으로 영원히 닫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료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6.


 자료 서고 안은 생각보다 어둡고 조용했다. 케케묵은 먼지와 숨죽인 정적, 블라인드 커튼 너머로 이따금 새어드는 빛만이 있었다. 잠시 바닥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지켜보던 란씽이 걸음을 옮겼다. 일정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책장 너머가 부산스러웠다.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다. 

 높은 책장을 몇 개나 지나친 자료 서고의 끝, 가장 깊은 구석에 익숙한 뒷모습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책이나 서류 따위가 뒤죽박죽 흩어져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 요란한 소리는 이것이었을까. 란씽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췄다.




 "선하."




 그리고 불렀다.

 안으로 옹송그린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갑……, 자기 무슨 일이에요?"




 오랜 침묵을 깨고, 이윽고 선하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란씽을 등진 채였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미리 연락 줬음 좋았을 텐데. ……참 그렇지, 휴대폰을 꺼놓은 거 같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아, 지금 몇 시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 이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있어요."




 푹 잠긴 목으로 횡설수설하는 한편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분주히 긁어모았다. 숙인 고개 아래 표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이 닿지 않았던 곳을 억지로 짓밟고 들어온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만큼은 잠시 모른 척 눈 감기로 했다.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사방을 더듬던 두 팔이 멎었다. 또 한 발짝, 이번엔 열 손가락이 뻣뻣하게 오므라졌다. 한 발짝, 잔뜩 힘 준 손이 파르르 떨린다. 마지막 한 발짝 정도의 간격을 둔 뒤에야 멈췄다. 둥글게 굽은 등은 한 눈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보였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야." 




 란씽은 그 등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다치게 한 적 있어. 영영 못걷게 만든 적도 있어. 아버지를 죽게 두었어. 내 페널티는 그 속죄야. 내가 견뎌야 해."




 마침내 선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날, 조금이나마 속내를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란씽은 짓무른 눈가를 닦아주기보다 그 앞에 무릎 굽혀 시선을 맞추길 택했다. 




 "이건 선하 몫. 알아. 그래도 당연한 건 아니야. 그래서 곁에 있고 싶었어. 계속."




 시작은 확실하지 않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묻어야 했다. 선한 얼굴, 모나지 않은 성격, 좋은 머리와 깊은 지식, 뼈가 도드라진 발목, 뭐든 질겅거리는 아이 같은 버릇, 가끔 짓는 조마조마한 표정, 그 어떤 점에 이끌렸는지조차 란씽은 모른다.




 "선하."




 다만 확실한 것은 미련하게도 돌아서 온 마음이었다.




 "좋아해."






***

다시 읽기가 두렵다 눈이 고통받는다 도륵 도르륵

'SPED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날, 오전 열두 시 육 분  (0) 2014.06.22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0) 2014.06.20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0) 2014.03.13
S2M1, Morning Bus No.91 #party A  (0) 2014.02.27
SS2 천란씽 시트  (0) 2013.11.10
고록 :: 2014. 6. 2. 02:30 SPEDIS




 요사이 블루 던 시티와 인연이 깊다. 예의 91번 버스부터. 란씽은 자동차 열쇠를 챙기며 생각했다. 당시 추적하던 버스에 대해서 큰 수확은 없었으나, 파랗게 색이 변한 우체통을 새로 칠하는 사람들이라면 얼핏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별일이었던 모양이다. 

 블루 던 시티까지는 란씽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애셀에게 같이 갈 거냐고 물었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괜찮다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요전에 겪었던 현장이 요란했던 탓일까. 다행히 누가 다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인트라넷을 타고 오간 얘기를 몇 개 주워듣자면 소란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확실히, 꼭 현장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랩에서 지원해주는 편이 나을 지 모른다. 란씽 역시 랩 요원이 현장에 직접 나가는 데에는 부정적이다. 왜냐면 그때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휴가 내셨었죠?"



 란씽은 옆에서 들린 토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걱정을 담은 눈빛에 란씽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몸이 좀."

 "어쩐지. 저, 선배가 휴가 쓰신 거 처음 봐서 내심 걱정했었어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응. 고마워." 

 "참, 운전은 제가 할까요? 저 길도 잘 아는데."



 란씽은 고개만 회회 젓다 뒤늦게 나중에 피곤하면, 하고 덧붙였다. 때마침 루시에게 보고를 마친 리안이 로비로 내려왔다.

 세 사람을 태운 차가 느릿하게 사무국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블루 던 시티까지는 제법 걸리니까, 그동안 사건에 대해 정리라도 해볼까요?"



 그러자 통신기 너머의 애셀이 대단한 건 없어, 하고 말 문을 열었다.



 -"처음엔 단순한 이변으로 생각하고 리페인팅하고 넘어갔던 모양인데. 그다음 주 금요일에 또 변했대. 그다음 주 금요일에도."

 "갑자기 늘었네요."

 -"갈수록 변하는 우체통 숫자가 늘었다나 봐. 지난 금요일엔 서른 개 이상 발견됐다네, ……요. 최초 발견 지역은……무슨 도서관 앞인 거 같은데. 지도 앱으로 위치 정보 보낼게."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한 토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운전석 쪽으로 화면을 쭉 내밀며 란씽에게도 보여준다. 란씽이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리안에게 말했다.



 "여긴 시립 도서관 앞이에요. 블루 던 시티에서 가장 큰 곳이라, 사람들도 엄청 많이 다녀요."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이란 말이군요."

 -"다른 우체통 위치도 찍어줄게. 잠깐……, 보여?"



 뒤이어 화면에 파랗고 빨간 점들이 가득 차 깜빡거렸다. 토리는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며 우체통 위치를 확인했다. 리안이 아는 곳이냐 물으니 대충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화면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였다.



 -"파란 색 점이 색이 변한 적 있는 곳이고, 빨간 색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곳이야."

 "이렇게 보니 우체통이 생각보다 많네요. 요즘은 편지 같은 건 거의 안 써서 많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애셀 씨, 변색된 우체통에서 발견된 점이거나, 특이점이라거나. 뭐 그런 건 있나요?"

 -"어……. 거기까진 보고를 못받았는데. 지금 받은 자료로 알 수 있는 건, 으음. ……총 아홉 번의 변색이 있었고, 변색된 우체통은 시내 번화가를 중심으로 고르게 분포 돼있고. 갈수록 변색되는 숫자가 늘어난다는 점이랑……. 매번 똑같은 우체통이 변하는건 아닌 거 같고."

 "그렇군요. 관할서에도 한 번 들려야 할 거 같네요."

 "앗, 그럼 서에는 제가 다녀올게요. 두 분은 먼저 가서 조사하고 계세요."

 


 그러자 리안이 혼자서 괜찮겠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토리는 코끝을 훔치며 씩 웃어보인다.



 "헤헤, 네. 저희 집 앞마당 같은 곳이니까, 위치만 말씀해주시면 금방 찾아갈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찍어준 거기, 거기는 아홉 번 다 색이 변했다는 모양이니까."

 "그럼 시립 도서관 앞에 있다던 우체통부터 살펴야겠네요."

 -"뭐 그렇겠……. 어, 어어."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랩이 다소 소란스럽다.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은 애셀이 잠시만, 한 것을 끝으로 마이크가 바닥에 닿으며 탁탁거리는 소리를 낸다. 란씽이 뒷좌석을 힐끔 보니, 다소 긴장한 기색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여태껏 오가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란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브라반트 씨?"



 대답은 잠시 간격을 두고 들렸다. 별 거 아냐, 하고 말을 흐리는 애셀의 발음이 흐리게 뭉개진다. 란씽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재촉하려는 찰나,



 -"뭐해요, 브라반트 군?"

 -"얼른 와서 더 드세요. 피자 다 식겠어."



 ……아, 아아.



 -"어, 그럼. 잠깐 실례."



 세 사람은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텁텁한 자동차 안 공기 속에 왠지 모를 피자 냄새가 스며있는 기분이 들었다. 침묵은 다소 오래 이어졌고,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잠시 후 토리가 저, 하고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희도 휴게소나 들렀다 갈까요?"



 빠르게 두어 번 깜박거린 토리의 속눈썹 끝이 평소보다 아래로 쳐진 듯해, 리안이 실없이 웃었다.





***





 "그럼 담당 형사님 뵙고 바로 갈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시거나, 이동하시거나 하면 연락 주세요!"

 "응."

 "이따 봐요."

 


 토리를 블루 던 시티 중앙 경찰서 앞에 내려준 뒤, 란씽과 리안은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제의 우체통은 아직 도색 작업을 하지 않은 모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마다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블랙 스커트 시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어, 박사님도 그 얘기 하던데."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은 없나요?"

 -"안 그래도 검토해봤는데, 각 도시 상징색으로 변한다는 거 말고는 없는 거 같……아요. 블랙 스커트 시티 건은 단발성으로 그쳤던 거 같고."

 "그렇군요……."



 리안이 우체통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란씽의 시선을 느낀 리안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표면이 약간 울퉁불퉁하네요. 색이 변할 때마다 리페인팅해서 그런가 봐요. 여기, 흘러내린 자국도 있고."

 "음."

 -"아, 샘플 채취할 수 있으면 해오라는데. 페인트 안료가 변이한 걸지 모른다나?"

 "그럼 우체통이 손상되지 않을까요? 이것도 엄연한 기물훼손인데."

 -"잘 안 보이는 부분은 괜찮지 않아? 바닥 부분이라든지, 귀퉁이라든지. 어차피 안 보이면 상관 없지 않나."

 "그래도……. ……란씽씨?!"



 이미 란씽은 뭉툭한 손톱 끝으로 우체통 바닥을 슬슬 긁고 있었다. 리안의 동그란 눈과 마주치자 머쓱해하며 그만두긴 했지만, 이미 손톱 끝에 굳은 페인트 조각이 걸려 있었다. 



 "란씽씨, 그건……."

 -"거기 아저씨가 했나 보네. 어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게." 



 잠시 말을 고르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SPED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0) 2014.06.20
고록  (1) 2014.06.02
S2M1, Morning Bus No.91 #party A  (0) 2014.02.27
SS2 천란씽 시트  (0) 2013.11.10
((제목 뭘로할지 고민하는 문장))  (0) 2012.10.12






1.



 모자, 티셔츠, 조끼, 스티커……. 꼭 아이돌 팬클럽 소품 같다. 하긴, 열광하는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할지도 모른다. 란씽은 리안이 꺼낸 선데이 모닝 관련 물품들을 쭉 훑으며 생각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변에 연관 지어 생각하길 좋아했다.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길 가다 동전을 주워도 이변,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쳐도 이변, 벽에 걸어놨던 시계가 떨어져도 이변, 상사가 오늘따라 친절해도 이 역시 이변이라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크고 중요한 일까지 그랬다. 선데이 모닝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라고. 보고받은 바로는 그렇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는 란씽은 이름자나 겨우 들어본 정도다. 다만, 저곳의 머리꼭지에 있는 자들이 머리 꽤나 쓴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좋은 머리를 무얼 위해 쓰고 있는지는 더 쑤셔봐야 알 일이다.

 일행이 뿔뿔이 흩어진 뒤로도 란씽은 조금 더 고민했다. 발로 뛰어 둘러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터다. 란씽은 익숙하지 않은 페이크 앱 메인 페이지를 해맸다. 타임라인은 일정한 속도로 쭉쭉 밀려 올라왔다. 전자기기와 영 친하지 않은 그로서는 따라 읽는 게 고작이다. 란씽은 휴대폰을 몇 번 더 조작하다 이내 포기한 듯, 목폴라 끝의 마이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중형 승합차 수배 부탁해."

 -"승합차요? 봉고?"

 "응."

 -"알았어요. 곧 준비해볼게요. 위장은 어떤 걸로?"




 조금이라도 란씽과 어울려 본 사람은 안다. 그가 거짓으로 꾸미고 가장하는데 굉장히 서투르다는 것을. ……그러니까 되도록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으면서도 관찰할 수 있는, 유리창 너머로 훑어보는 정도가 무난하고 좋을 것이다. 요컨대, 택배 배달원 같은.





2.



 란씽은 랩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정확히는 어디까지가 랩의 영역인지를 모른다. 그저 어렴풋, 제가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니 랩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거니 여기고 있다. 종종 놀러 가듯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때도 있지만 그뿐, 공용어가 익숙해진 지금도 랩 요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전문용어가 거의 그렇다. 다만 다른 과에 비해 작고 일손도 부족한 랩에서 그토록 많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감탄한다. 지금도 그렇다.




 -"스티커로 급조하긴 했는데, 다른 굿즈랑 비슷한 느낌으로 뽑아봤어요. 명색이 배달원이니까, 트렁크에도 적당한 걸로 좀 채워넣었구요."

 "고마워."

 -"뭘요."

 



 검은 승합차 옆면으로 노란색 9와 1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문구 - 마음까지 전해드립니다, OO플라워몰.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그보다 분명 택배 배달원이라고 한 것 같은데 꽃 배달이라. 정말 꽃이 있을까 싶어 화물칸을 열어보니, ……있었다. 꽃다발과 꽃바구니가 종류 가릴 것 없이 한가득. 




 -"어때요?"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웃음기 섞인 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분들하고 상의해서 고른 건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다녀올게."

 -"꼭 모두 다 배달 하셔야 해요? 저렇게 예쁜데, 시들어버리면 아쉽잖아요."




 란씽은 말없이 모자 챙을 눈썹까지 푹 눌러썼다.




3.




 -"해리스군이 91번 버스에 탑승했어요. 노선표 확인해주세요."

 -"레드 페퍼 시티 다음은 음, 블루 던 시티네요오."

 -"그쪽으로 간 사람은……."

 -"미스터 천."

 "가고 있습니다. 호수 공원."

 -"QR코드는 스캔해보셨어요?"

 "응. 단서는 OO색 사람의 손안에."




 루시가 마뜩찮은 듯 혀를 찼다.




 -"블루 던 시티는 파란색이겠군요."

 -"파란색 사람……. 그림이나 동상 같은 걸까요?"

 -"보면 알겠지. 미스터 천,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십 분 이내."

 -"서둘러 줘요."




 란씽이 핸들을 크게 꺾었다. 한적한 도로 위, 큰 곡선을 그리는 바퀴가 마찰음으로 요란했다. 그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랩까지 들렸는지 누군가 너무 밟진 말라며 걱정스레 덧붙였다.




***




 파란색 사람은 빨간색 상자만큼이나 직관적이었다. 호수 공원 입구 맞은 편에 큼지막한 동상이 하나 있었다. 군데군데 거뭇하게 변색된 파란 동상 옆으로 표지판도 하나 붙어 있었다. 블루 던 시티 초대 시장이라고. 

 그리고 란씽은 벌써 삼십 분째 동상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아직인가?"

 "……."

 -"대답해, 미스터 천."

 "아직입니다."




 토리가 찾은 QR코드는 우체통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고 했다. 아마 이 동상도 어딘가에 코드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코드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 번씩 더듬어보았는데도 손끝에 걸리는 것 하나 없다. 정차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루시가 초조하게 란씽을 닦달했다. 랩 요원들도 덩달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나, 쩝하고 마른 입맛을 다시는 소리라거나. 란씽은 꼭 말아쥐어 하늘로 치켜든 동상의 왼손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찔끔거리며 내리는 눈송이가 주먹 위로 얕게 쌓였다. 들었던 고개를 천천히 내리자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떨어진 오른손이 보인다. 왼손과는 다르게 가볍게 반쯤 말아, 엄지와 검지로 까만 틈이 보였다. 




 "양손 모양이 다른데."

 -"앗, 그거 수상한데요오."

 -"……단서는 파란색 사람의 손 안, 이라고 했죠?"

 "확인할게."




 생각보다 틈이 좁았고, 검지 손가락은 마디가 걸려 그 안으로 채 들어가지 않았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써서 한참 긁어댄 끝에 손끝에 흰 종이가 딸려 나왔다.




 "찾았어."




 코드를 스캔하자 화면에 웹 페이지 하나가 떠올랐다. 파란색 제목 아래로 까만 글자가 빽빽하다. 란씽은 먼저 링크와 캡쳐 화면을 랩으로 보낸 뒤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었다. 블루 던 시티는 이곳, 호수 공원 앞 동상에서부터 운행하는 듯 했다. 쭉 훑어 내려가니 맨 마지막에 링크 하나가 덜렁 남겨져 있었다. 무심코 주소를 꾹 누르자 바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어플리케이션 다운로드 화면이었다.




 "91승차권." 

 -"네?"

 "운행표 맨 밑 주소. 앱 다운 경로 같아. 앱 이름은 91승차권."

 -"앱이라고요? 잠시, 이쪽에선 그냥 페이크 페이지만 열리는데……."

 "시간 됐어. 미스터 천, 버스는?"




 곧 왼편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어렴풋 들렸다.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려한 민트색으로 도색한 외관에 솜사탕 같은 귀여운 마스코트를 단 대형 버스가 건물 사이로 나타났다. 시내버스는 물론, 시외버스도 모두 끊긴 시간이었다. 란씽은 막 코너를 도는 버스를 보며 말했다. 어느새 가는 눈송이는 질척이는 우박으로 변해있었다.




 "옵니다."





4.




 버스 안은 란씽의 막연한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최소한의 좌석과 손잡이가 다닥다닥 달린 시내버스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우등 좌석 버스처럼 크고 널찍한 의자가 두 개씩 두 줄, 자리마다 있는 컵홀더와 간이 탁자. 일개 버스치고는 지나치게 시설이 좋다. 란씽은 저를 위아래로 훑는 버스 기사에게 방금 다운받은 어플리케이션 화면을 보여줬다. 버스 기사가 턱짓한 쪽에 단말기가 있었다. 휴대폰을 가져다 대니 삑하는 기계음과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구원되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버스가 출발했다. 아무리 서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치 빙판 위로 미끄러지듯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쓱 훑어보는 시선 끝에 토리가 눈에 띄었다.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란씽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몸을 움찔했으나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옆자리, 긴 생머리의 여성은 자기 얘기에 심취해 그저 조잘거리고 있었다. 란씽은 버스 맨 뒤의 빈자리에 앉았다. 버스 안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였다. 워낙 의자가 크고 넓은데다 자리마다 붙어있는 편의 시설따위가 많아, 실질적인 좌석 수는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도 다 차있지 않고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탑승 완료. 다음 지시 부탁.]

 [@Lanxing_C 캐낼 수 있는 만큼 캐내.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갈 것.]




 역시 막연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란씽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창 너머로 어두운 도시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조용했고, 낮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까지 어렴풋이 들렸다. 란씽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간간이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간만에 강의 왔는데 너무 늦어서……." 

 "……학교에선 뭐라고……."

 "……다음 주부터 강의실 변경한다던데, 공지가……."

 "……오늘 전달받은 작업하는데 어떤 거지가……."

 "……지난번에 교수님하고 상담했었는데……." 

 



 강의, 학교, 교수님, 강의실. 대화 내용만 들으면 평범한 대학생들의 것이었으나, 말을 주고받는 이들 중에는 분명, 대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신도 다수 대학 용어를 은어 ] 

 보고를 위해 휴대폰 자판을 꾹꾹 누르는데 문득, 이질적인 단어 하나가 섞여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작업?

 란씽은 단어가 들린 쪽을 곁눈질했다. 젊은 사내가 한쪽 어깨로 휴대폰을 받친 채 떠들고 있었다. 승객 중에선 목소리가 제법 두드러지는 편이라 뭐라고 말하는지 무리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 그거. 교주님께서 시킨……. 작업할 때 한 번도 누가 참견한 적 없었는데 말야. 왜, 다들 이변이다 싶으면 폰 꺼내서 사진이나 찍고 트위터나 하고 말잖아. 어어. 근데 그 거지는 막 끼어들더라고. ……글쎄 그랬다니까? 그래도 시키신 대로 잘 마무리했어."




 ……아무리 들어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할 법한 말들은 아니다. 화제는 곧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란씽은 그제야 멈췄던 손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은어로 사용. 신도 한 명 이변에 대해 언급. 닉이 목격한 이변 추정. 이변을 작업으로 지칭.]

 [@Lanxing_C 계속 감시해.]




 버스는 중간 중간 특정 장소에 정차했다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몇명씩 버스에서 내리고 그만큼 다시 채워진다. 그런 와중에도 놀라울 만큼 관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차창 밖 풍경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버스가 란씽을 태운 이래로 쭉 멈춰있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대화 중. 이후 작업 언급 없음.] 

 [통화 종료. 특이 사항 없음.]

 [블루 던 마지막 역 정차. 남자 하차. 미행?]

 [@Lanxing_C 됐어. 그보단 목적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

 [@Lady_Ruthy 확인.]




 어느새 토리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종전의 사내를 감시하는 사이 버스에서 내린 걸까. 란씽은 보고하기 급급해 대충 건너뛰었던 타임라인을 훑어내려갔다. 단답형으로 점점이 이어지는 제 트윗 사이로 활짝 귀여운 이모티콘이 보였다. 란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선배님들! 저 번호 땄어요!! X')]




 블루 던 시티를 벗어난 91 버스가 블랙 스커트 시티로 접어들고 있었다.





5.




 "천란씽, 토리 헤더웨이, 하차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침 해가 밝고 나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란씽이 버스에 탔던 블루 던 시티의 호수 공원 앞이었다. 91번 버스는 블랙 스커트 시티에서 퍼플 포레스트 시티로, 그리고 다시 레드 페퍼 시티로 향했다. 순환선이었던 것이다. 레드 페퍼 시티 관광 안내소로 돌아왔다고 보고했을 때, 인트라넷 타임라인은 탄식으로 덮였다. 결국, 루시가 원하던 91번 버스의 목적지는 알아내지 못한 채로 일단락되었다.




 -"둘 다 수고 많았어요. 퇴근……, 하하. 퇴근하기 전에 일단 수사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에요."

 "치프는?"

 -"순환선인 거 확인한 다음에 바로 나가셨어요.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음. 곧 갈게."




 짧은 기계음을 끝으로 통신이 종료되었다. 란씽은 그제야 무선 이어폰을 빼냈다. 하루 내 이물이 박혀있었던 귓구멍이 얼얼했다. 옆에서 토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꼬박 밤을 새운 셈이니 피곤할 법도 하다. 어깨를 툭툭 짚으니 눈초리를 둥글게 휘며 배시시 웃는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어요. 어느 정도 수확은 있었기에 주고받는 인사는 마냥 무겁진 않았다.




 "이렇게 밤샌 건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처음이에요."

 "가는 동안 한숨 자."

 "선배는요? 선배도 피곤하실 텐데."

 "괜찮아."




 바닥은 밤새 내린 것으로 질척거렸다. 찰박거리며 한참 걷던 두 발걸음이 검은 승합차 앞에서 멈췄다. 마음까지 전해드립니다, 하고 토리가 차 옆면의 문구를 소리내 읽었다.





 "꽃배달……. 로맨틱하네요. 선배 아이디어에요?"

 "아니."




 한 글자씩 힘줘 말하자 토리가 큭큭 웃었다. 한나절 내내 꽃다발을 싣고 다닌 차 안에는 꽃향기가 채 가시지 않고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토리의 긴 속눈썹이 가물거렸다. 

 란씽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아무리 느긋하게 엑셀을 밟아도 차체는 위아래, 앞뒤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


이날...많은 일이 있었지(헬쓱

'SPED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0) 2014.06.20
고록  (1) 2014.06.02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0) 2014.03.13
SS2 천란씽 시트  (0) 2013.11.10
((제목 뭘로할지 고민하는 문장))  (0) 2012.10.12


"조심."






Name : 천 란씽 (陈蓝星 chénlánxīng)

ID : Lanxing_C

Sex / Age / Height : Male, 34, 189cm

Blood / Eyes / Hair : RH+O, dark brown, black

Position : 중앙수사국 특수재난관리과 필드 요원



인상착의, 성격 및 어투, 구사언어


-동양계. 짙고 곧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 딱딱해보이는 무표정.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다. 머리칼은 앞머리가 눈썹에 닿지 않을 만큼 짧게 유지한다. 어깨가 넓고 다부진 체격. 무채색 트렌치코트에 검은 목티를 즐겨 입는다. 실내에서는 활동성 좋은 옷을 선호. 양복, 정장류는 꺼린다.

-답답할 만큼 우직하고 끈기 있다. 다소 벽창호. 생긴 데 비해 다정한 구석이 있다. 자기 생각은 확실하나 남에게 피력, 설득하는 일이 드물다. 강하게 의견을 내비칠 때는 대개 요원의 안전이 걸린 경우. 말보다 행동이 빠름.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갈 수록 줄고있다. 아이와 노인이 어렵다.

-공용어가 서툴던 시절의 습관으로 말이 짧다. 보통은 필요한 말만 단답형으로. 존댓말은 하십시오체, 반말은 해체. 반말 선호.

-공용어, 중국 보통화.



무기/특수능력


-휴대 무기 없음.

-능력 : 신체 강화, A+

일정 시간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단순히 근력을 높이는 것 부터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맨 손으로 건물을 때려부술 수 있을 만큼. 패널티는 마비로 능력을 사용한 시간에 비례해 전신이 마비된다.

오랜 시간 신체 전반에 특수 능력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체·근력 따위가 월등히 좋다. 이에 따른 페널티는 누적되었다가 신경이 부분적으로 영구 마비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장기간, 그리고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현재는 목 아래의 피부 감각이 마비된 상태. 미비한 촉각, 압각정도만 느낄 수 있다. 영구 마비가 상당 이상 진행된 이후 신체 내부에 산발적으로 원인 불명의 고통을 느낀다.

여러가지 이유로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삼간다.



이력 및 특기사항


-검정고시로 고졸.

-상해 전과 있음.

-특재과 필드 요원 근무 5년 차. 일전에 어느 아파트촌에 작은 뜨개방을 꾸려 겸업도 했으나, 치프가 바뀐 이후로 가게를 정리하고 수사국 근처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다.

-팔극권八極拳, 벽괘장劈掛掌 권사.



기타


-취미는 수공예 전반. 가장 즐겨하는 것은 자수로 손이 빠른편. 시간이 빌 때면 뭐든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일 년에 한 번 일이 주 남짓의 장기 휴가를 신청한다. 이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휴일에도 출근.

-외동. 양친 모두 사망한 뒤로 줄곧 혼자 살고 있다.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준 것으로, 란씽화(蓝星花)라는 꽃이름에서 따왔다.





'SPED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0) 2014.06.20
고록  (1) 2014.06.02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0) 2014.03.13
S2M1, Morning Bus No.91 #party A  (0) 2014.02.27
((제목 뭘로할지 고민하는 문장))  (0) 2012.10.12
SS2 천란씽 시트 :: 2013. 11. 10. 22:00 SPEDIS






 벌써 며칠째 이상하리만치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란씽은 실 한 번 꿰지 못한 채 바늘을 내려놓았다. 파란 꽃 위, 몸뚱이만 덜렁 있는 나비가 볼품없어 보였다. 색실로 날개를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을 뭐 그리 어려워 이렇게 오래간 붙잡고 있는지. 한 것 없이 뻐근한 뒷목을 문지르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자정을 훌쩍 넘겼다. 멍청하게 내려다보길 몇 시간, 이렇게 오늘도 별 소득 없이 완성을 미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던가. 란씽은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천을 가만 보았다. 지난여름, 틈틈이 수놓을 요량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검은 실로 더듬이나 날개 외곽선 따위를 겨우 만들어 놓곤 그대로 잊어버린 녀석. 끝이 조금 구겨진 채 수틀에 고정된 아마亞麻천에 핀 란씽화藍星花 몇 송이가 피어, 그 위로 미완성의 나비가 내려앉아 있었다. 색깔, 나비에 어울리는 그 색이 문제였다. 애초에 변덕처럼 시작한 자수다. 이름 대신 놓을 만큼 손에 익은 란씽화지만 한 번도 나비를 함께 놓은 적은 없었다. 노란색, 흰색, 빨간색, 산발적으로 떠오른 색깔은 곧 검게 스러졌다. 실타래를 고르려 위아래로 실을 쓸던 손가락도 멎기 일쑤다. 특별히 공을 들인다기보다는 마땅한 생각이 없었다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참 날이 더울 즈음 시작한 것이니 시간이 제법 지난 만큼 슬슬 완성 시킬 수 있을까 싶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뾰족한 생각이 없는 것이 영 글러 먹었다. 그래도 발견한 김에 일단 수 놓는 흉내라도 낼까 싶어 천과 재료를 추려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선하와 마주친 것은 휴게실로 가던 도중이었다. 연구실 문이 열려있길래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익숙한 뒤통수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뭐해?"



 선하는 곧장 뒤돌아 보았다. 이번에 물고 있는 것은 다 마신 커피의 빨대 같았다. 한 손에 큰 유리컵 같은 것을 든 채로, 안에는 밝은 주황색 금붕어 서넛이 유유히 놀고 있었다.



 "아, 란씽씨. ……혹시 지금 시간 있어요?"



 란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자수거리를 등 뒤로 빼 허리춤에 쑤셔 넣었는데 다행히 거기까지 미처 신경 쓰진 못한 기색이다. 선하는 한숨 놓으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휴게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필요하네요. 괜찮으면 좀 도와줄래요?"



 그가 손짓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과연. 투명한 사각 수조 안에는 자갈이나 작은 기계, 모형 물풀 따위가 들어 있었고 그 옆으로 큰 대야 가득 물이 담겨 있었다. 란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왼쪽 어깨로 대야를 이고 비는 오른손은 수조를 들었다. 선하가 곤란한 표정으로 하나는 제게 달라고 했는데, 란씽은 못 들은 척 성큼 걸음을 뗐다. 




***



 "금붕어 산 거 선하야?"

 "아뇨, 교통 안전과에서 기르던 금붕어들이래요. 원래, 음, 등이 빨갛고 배가 흰 색인 종류였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 전체가 오렌지색으로 변했다나." 

 "이변?"

 "그쪽도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조사도 할겸 우리 부서에서 한 번 키워보라고 맡겼대요."

 "어땠어?"

 "금붕어 자체는 평범해요. 세포 단위의 변이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지만……, 이쪽은 일단 생략할게요. 어쨌든 검사 마치고 그대로 랩에 두려다 휴게실이 나을 거 같아서 그쪽으로 옮기려고 한 거에요." 

 "혼자?"

 "뭘요?"

 "이거."

 "아, 아아. 당연히 다른 분을 부르려고 했죠. 마침 란씽씨가 오셔서 부탁드린 거구요."

 "랩에 다른 사람은?"

 "일단 모두 자리에 안 계셔서."

 "음."

 "그보다 정말 괜찮아요? 나눠들 수 있는데."

 "괜찮아. 금붕어 들어. 멀미 조심해."

 "그거 금붕어 얘기죠? 이 정도로는 안 할 거에요. ……아마도?"

 "으음. 조심해."

 "하하, 네."



***



 수조는 금붕어 수에 비하면 큰 편이었다. 가로로 두 뼘 세로로 한 뼘 되는 바닥 가득 자갈을 깔려면 무게가 제법 나갈 것이고, 수조 안을 채울 물까지 따지면 무게도 양도 상당하다. 확실히 란씽이 랩 안을 들여다본 것은 잘된 일이었다. 선하는 먼저 자갈을 깔고 그 위로 수초나 돌 따위를 적당히 놓고 기계를 붙였는데, 알고 보니 기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선하의 설명을 따르면 금붕어가 숨 쉴 수 있게 해준다고. 그런 식으로 금붕어의 보금자리는 제법 구색을 갖추었다. 이제 수조에 물을 옮기는 일만 남았다. 란씽이 대야째로 물을 부으려니 선하가 얼른 말린다. 



 "아, 물을 한 번에 부으면 바닥재가 일어서 바로 옮길 수 없대요. 조금씩 나눠 넣던지 펌프나 스펀지를……."



 바닥재? 일어? 선하는 저를 쳐다보는 란씽의 표정에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멋쩍게 웃었다.



 "밑에 깔린 모래랑 자갈 같은게 물하고 섞여서 흙탕물처럼 되는 거에요. 물이 흐리면 금붕어를 바로 옮길 수 없으니까요. 이리 줘요. 제가 할 게요."



 수조 벽을 따라 물을 붓자 바닥부터 조금씩 차올랐다. 이제 대충 제가 할 일은 끝난 듯 보여 의자에 앉으려던 란씽이 멈칫했다. 등허리에 걸리적거리는 무언가를 알아챈 후에야, 아까 선하를 만났을 때 대충 쑤셔 넣은 자수거리를 기억해냈다. 이걸로 두 번째다. 란씽이 어정쩡하게 서서 선하가 힐끔 눈짓하며 물었다.



 "새로 만든 자수인가 봐요."

 "아직 아니야."

 "어라, 완성한 거 아니었나요?"

 "나비 날개 못했어." 

 "아하."

 "색을 못 정해서."



 변명하듯 묻지도 않은 걸 대답하는 와중에도 란씽의 시선은 자수를 향해 떨어졌다. 날개를 채울 색은 한결같이 떠오르지 않는다. 선하는 그의 고민을 함께했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냉장고, TV, 책상과 의자, 쿠션, CD플레이어, 책꽂이, 창문, 커튼. 저마다의 색깔로 찬 휴게실을 살피던 선하의 시선이 어느 한 부분에 머물렀다.



 "하늘색은 어때요?

 "음."

 "하하, 이상하려나. 왠지 파란색하고 어울릴 거 같아서요."



 란씽은 좋다 싫다 말 없이 뜸을 들였으나, 곧 바늘을 잡고 색실을 골랐다. 옅고 짙은 하늘색 실을 몇개씩 꺼내는 것을 보며, 선하는 한 번 웃곤 부지런히 물을 옮겼다. 그가 금붕어의 이주까지 모두 끝냈을 때, 란씽은 막 윗날개에 쓸 바탕색을 깐 참이었다. 선하는 란씽을 잠시 구경하는가 싶더니 맞은 편에 앉고는 앱게임을 켰다. 란씽과 눈이 마주치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쉬어야죠."



 라며 웃었다. 



***



 시간은 느릿하게 흘렀고 휴게실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요깃거리를 찾아 온 리로이와 가볍게 잡담을 나누고있던 중, 신晨이 커피를 마시러 잠시 들렸다. 마침 캐서린과 세스가 간식거리를 사와 다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이든이 못마땅하게 잔소리를 했고, 선하는 얕은 위기를 강처럼 넘겼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조용히 휴게실에 들어온 클린트가 둘을 향해 꾸벅 목인사를 하더니 의자에 몸을 구겨 넣어 눈을 붙였다. 자? 자네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기가 무섭게 클린트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지나가며 자수를 구경하던 휴와 가볍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녹수와 기우는 랩의 일 관련으로 선하를 찾았었다. 닉은 지나가는 말로 니키의 겨울옷을 부탁했고 시온은 물끄러미 란씽의 손을 보았다. 가볍게 운동하러 가던 데미안, 새 소설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던 노아. 아드리안은 오래된 카페의 디스크자키처럼 적당한 CD를 골라 틀어주고 갔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나비의 날개가 제 모습을 모두 갖췄을 때, 휴게실에 남은 사람은 선하와 푹 잠든 클린트 뿐이었다.



 "예쁘네요."



 란씽에게 자수를 건네받은 선하가 가만히 감탄했다. 그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은 어느새 일회용 포크로 바뀌어 있었다.



 "고마워."

 "뭘요."



 어깨를 으쓱하는 선하의 어깨로 반쯤 누운 햇빛이 쏟아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었다. 란씽이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켜는데 선하가 갑자기 엇,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그의 표정이 당혹스럽다. 왜 그래? 묻고 나서야 란씽 또한 묘한 점을 깨달았다. 자수 천 뒤에 남는 실 자국이 없었다. 정확히는 방금 끝마친 하늘색 나비의 실자국 만이 없다. 그가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선하의 손과 천 사이엔 분명 있었다. 나비, 마치 산것 처럼 파닥거리며 날고있는 파란 나비가. 



 "어……."



 천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란씽도 선하도 당황스러워 말이 없었다. 혹시 선하의 숨겨진 특수능력이라도 되는 걸까. 란씽의 시선을 느낀 선하가 고개를 내저으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자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자고있는 클린트가 한 건 아닐테니 분명 스스로 일어난 일이 맞다. 이변. 문득 란씽은 지루한 고민을 끝낼 수 없었던 건 이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가볍게 탁자 위로 날아오른 나비는 파란 날개를 팔랑거리다가, 이내 수조 끝에 내려앉았다.


***


내새끼랑 내남자랑 썸탐(멋짐(근데그거아님



'SPED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오후 열한 시 사십칠 분  (0) 2014.06.20
고록  (1) 2014.06.02
S2M2, Snap it, work it, quick erase it Party 3-1  (0) 2014.03.13
S2M1, Morning Bus No.91 #party A  (0) 2014.02.27
SS2 천란씽 시트  (0) 201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