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8.
뺨이 조금 허전하다고 느꼈을 때, 란씽은 비로소 잠에서 깼다.
블라인드 밖은 아직 어둔 쪽빛으로 흐렸다.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딱딱한 바닥에 제 코트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깊게 잠들었던 걸까.
"선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긴, 선하가 이런 시간에 새삼 서고를 둘러볼 리 없다. 자료 서고가 꼭 선하의 은밀한 방주 노릇만 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래 취지대로 쓰이는 일 또한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 요즘은 그보다 좀 더 내밀한 용도로 쓰인다. 예를 들면 오늘 같은.
란씽은 슬그머니 코트를 들춰보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코트 밑에도 선하는 없다. 역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랩, 화장실, 세탁실, 샤워실……. 선하가 갈 법한 장소를 하나씩 떠올리는데 서고 문이 열렸다. 란씽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고개를 쭉 내밀어 책꽂이 너머를 기웃거렸다. 그 사이로 선하가 보일 리 없건만 열심히도 허리를 곧게 폈다. 곧 선하가 터덜거리며 란씽이 있는 안쪽으로 걸어왔다. 선하는 란씽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얼른 란씽을 품에 안았다. 차갑게 식은 셔츠 사이로 낯선 냄새가 풍겼다. 묘한 위화감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선하가 란씽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
달콤하게 흘러나온 말은 단어 마디마다 쓰디쓴 담배 냄새로 눅눅했다.
그제야 란씽은 선하가 여태까지 잠 못 든 채 제게 안겨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하의 긴 손가락이 란씽의 짧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헤집는다. 란씽은 얌전히 선하의 품에 안겼다. 부드럽게 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뿌연 연기 같은 감각이 되어 가물거렸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도, 몸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몸짓도 그렇겠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선하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짐작이나 할 뿐인 것처럼, 란씽은, 선하가 주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곁에 있는 걸로 만족할 줄 알았건만, 저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고개를 치켜든다. 부끄러운 일이다.
고작 일 년 남짓이 지났다. 마음에 품고만 살았던 그때가 너무도 아득히 느껴질 만큼, 란씽은 선하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가랑비에 젖어든 옷처럼 천천히 좋아하게 된 것과는 다르게 선하는 란씽의 모든 것에 스몄다. 그래서 란씽은 선하가 필요했다. 자못 절실히도. 선하도 저와 같을까. 그렇다면 저보다는 조금쯤 덜 좋아하고 덜 필요했으면 좋겠다고, 란씽은 생각한다. 선하를 괴롭게 하는 건 너무 크고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짐을 덜어주진 못할 지언정 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하의 특수 능력이 남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니어서 란씽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지금은 쿵쿵 뛰는 심장이 느껴지는 걸 감사히 생각하자. 가만히 선하의 심장 소리를 듣고있던 란씽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안경이 걸려있지 않는 귓가를 더듬으며, 란씽은 선하에게 입을 맞췄다. 까슬한 입술 사이로 선하가 느낀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쓰고, 끈적했다. 타인과 나눌 수 없는 모든 것이 선하의 혀에 녹아있었다. 선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랬냐고 나무라는 목소리가 귓가로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란씽이 원한 것이었다.
이번엔 란씽이 선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릎과 무릎이 그렇게 한참 얽혔다.
"자자."
선하가 란씽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란씽은 눈을 감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아마, 선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눈을 돌리는 대신, 란씽은 두 팔 가득 선하를 가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