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1
1.
처음 뵙겠습니다. 천란씽씨죠?
받으세요. 그동안 당신이 보냈던 돈입니다.
…….
동생이 퇴원한 지는 반 년 정도 됐습니다. 얘기는 들으셨나요?
…….
그렇겠죠. 결론부터 얘기할게요. 동생은 평생 걸을 수 없게 됐습니다. 퇴원한 뒤로도 계속 제 방에 틀어박힌 채로 술만 퍼마시고 있어요.
…….
……우리 집이……, 이런 돈을 받아야 할 만큼 궁하진 않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버러지같이 살아도 평생 그 아이 뒤 닦아줄 만큼은 산다는 뜻입니다. 그쪽 사정에 매달 이 정도 돈을 보낸 성의는 인정합니다. 일의 경위도 납득했습니다. 그 아이 평소 행실이 경박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쪽을 용서하겠단 뜻은 아닙니다. 어디 내놓을 만큼 자랑스런 동생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래도 피붙이는 피붙이더군요. 고작 이런 알량한 돈푼으로 위로나 사죄할 생각이셨다면, 정말, ……. ……아닙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더 하실 말씀 있나요?
…….
그럼 먼저 일어나죠.
영수증을 낚아챈 여자가 잰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란씽은 대답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멍청히 앉아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두툼한 봉투, 여자가 목을 한 번 축인 미지근한 커피와 잔잔하게 흐르는 오래된 경음악이 한데 섞여 빙빙 돌았다. 현기증마저 느껴져 이마를 짚는데, 갑자기 강렬한 통증이 몸을 꿰뚫었다. 란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먹 쥔 양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란씽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한동안 숨죽여 천장을 노려보았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빛이 천장을 가로지르며 한 뼘씩 길어진다. 그동안 통증은 불규칙적으로 심해지거나 잦아들거나 하며 이어졌다. 이렇게 수면 아래 가만 숨죽이던 것들이 돌연 자맥질할 때가 있었다. 불편하지만, 지금은 둘 다 제법 익숙해졌다. 란씽은 다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그저 견뎌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목구멍 아래로 또아리 튼 것을 여러 번 길게 내뱉으니 그제야 숨이 트였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란씽이 쭉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해가 건물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2.
늘 먹던 약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혹시 사무실에 남은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도 약은 없었다. 한참 제 자리를 뒤적거리다 문득, 며칠 전에 마지막 약 봉투를 찢으며 슬슬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던가. 란씽은 통증이 지나갔던 부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지나갔을까, 아니면 다시 두드릴까. ……로빈스한테 맡겼다던 진단표는 아직 남아있을까.
짧은 생각 끝에 휴게실로 향했다.
검사를 받고 돌아오면 사무국으로 돌아오기엔 조금 늦고 집으로 가기엔 조금 이른 어중간한 시간이 된다. 그 들뜨는 시간에 같이 술이라도 마시면서 어울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란씽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3.
이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철썩 소리를 내며 힘차게 백사장을 때리다가도 슬슬 뒤로 물러나고, 그렇게 끝없이 반복하며 흰 물거품이 부서지는 모양에 눈을 빼앗겼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발목이 푹 잠길 만큼 파란 물이 차올라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변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은 늘 파랬다 노랬다 벌게지는 태양 빛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모든 일이 그러했다. 이변은 걔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파도가 해변을 쓸어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는 날카롭게 후비고 할퀴어, 그 흔적을 분명히 남긴다.
어느 날을 경계로 갑자기, 같은 일은 없었다. 마비는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몸을 잠식했다. 사지의 끝에서 타고 올라오듯 시작된 란씽의 페널티는, 몸통에서 한데 엉겨붙더니 가속도가 붙어서 목 아래까지 넘실거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아마 2년 전 즈음. 몸 안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것은 생각보다 섬세하게 이루어져 있다네."
란씽의 검사 결과표를 한참 들여다보던 프로페서 닉, 닉 맥플러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가벼운 질문과 대답으로 분위기를 녹였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란씽은 눈을 깜박였다.
"어느 한 부분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삐걱거리기 마련이야. 톱니바퀴 사이에 작은 이물질이 물리는 것만으로 기계 자체가 고장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일세. 이건 조금 오래된 자료이네만, 자네처럼 감각신경만 마비된 환자가 학계에 보고된 바 있네. 몇 주에 걸쳐서 전신의 감각 세포가 마비되었다더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사내는 마비가 진행될수록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단 점이네. 펜으로 글씨를 쓰거나 단추를 잠그는 것 같이 손으로 하는 섬세한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하네. 그럼 천군은 어떤가?"
"이상 없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걸세. 군의 피부감각 마비가 상당 이상 진행된 지금,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변'이니 말이야. 피부 감각으로 받아들인 자극은 균형 감각을 이루는 한 축이 되기 때문인데, 으음. 걷는 걸 예로 들어볼까.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각이나 관절 위치는 감각신경이 받아들이는 자극에 따라 저절로 움직인다네. 그게 마비되면 눈으로 바닥과 자기 몸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조절할 수밖에 없네. 그래서 마음대로 걷고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는 게야. 우리 몸은 생각보다 촉각에 많은 의지를 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는 걷는 것뿐만 아니라……, 천군의 취미가 자수였던가?"
"네."
"아직 문제없이 하고 있을 테고."
란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깐 시선 끝에 한 김 식은 찻잔 손잡이를 말없이 매만지는 주름진 손이 들어왔다.
"……허허, 너무 많이 돌아왔구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천군. 일전에 내가 군에게 했던 말이 있지. 기억하나? 이변은 넘칠 만큼 인과를 따르고 있다고. ……이번 군의 페널티 건은, 말하자면, 인과라는 강을 따라 흐르던 이변이 강 밖으로 범람해 새 물꼬를 튼 것과 같다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은 닉 맥플러리가 안경을 위로 슬쩍 밀며 콧등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앞으로 군의 페널티는 언제 어떤 식으로 악화 되고 변이 될 지 알 수 없다는 걸세. 고통의 주기가 짧아질 수도, 강도가 강해질 수도 있겠지. 군이 앞으로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페널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네. 검사 결과를 봐선, 이미 능력은 군의 신진대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니 말일세. 이건 군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또, 이건 확률적인 문제이네만……,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마비가 진행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 이 이상 감각 세포가 마비되면 어떻게 되는지, 전에 말해줬을걸세. ……그런 뜻이지. 그런 게야."
마치 병명을 선고하는 의사처럼, 닉 맥플러리는 한 단어씩 조심스레, 하지만 분명히 발음했다.
"천군. 나는 모쪼록, 군이 깊이 생각해보고 판단하길 바라네."
통증을 느끼고, 약 두 달 정도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4.
"최근 통증이 가슴 쪽에서도 느껴진다고 하셨지요.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 기억하십니까?"
"오른쪽 갈비뼈 안쪽……,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복부, 왼쪽 허벅지 근육, 오른쪽 갈비뼈 안. 달리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는 없고요."
"네."
"확실합니까?"
윌리엄 그레인저는 세 번씩이나 확인을 받았다. 그러고도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하며 또 묻는다.
"집요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니 양해해 주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천씨가 느낀 증상에 의존해서 진단해야 하니까요. 참, 검사 결과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라고 해봐야, 늘 그랬듯 모두 정상입니다. "
이렇게 정상적인 수치가 나오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낮고 빠르게 지나갔다.
"일단 증상에 맞춰 다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알약 종류가 조금 바뀌었을 겁니다. 졸음이 심하게 오거든 두 번째로 작은 분홍색 약은 빼고 드세요. 한 달 치 드릴테니 다 드시면 그때 다시 오셔서 검사받은 다음에 처방 받으시고요."
"……검사요."
"네. 뭘 새삼스럽게 물으십니까. 어쨌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란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고 시선을 조금 낮췄는데, 그것 만으로도 윌리엄은 눈썹을 좁히며 란씽을 흘겼다.
"검사받으셔야 처방도 해드릴 겁니다."
"……."
"……천 씨."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윌리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반쯤 빈 진단서를 마저 채웠다.
병원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딱 한 달에 맞추지 못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윌리엄의 날카로운 시선을 어찌어찌 흘릴 정도로는 가고 있었다. 주로 약이 다 떨어질 즈음에 날을 잡아 다녀오는 식이었다. 가끔은 병원 갈 시간마저 아까울 만큼 바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조차 윌리엄은 완강했다. 검사받을 시간이 없으면 월차라도 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검사를 받아도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상 없음. 한 번도 정상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다른 수치가 나온 적이 없었다. 늘 같은 숫자가 나왔다는 뜻이다.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든 완벽하게.
닉 맥플러리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했다. 정확히는, 언제나 일정하게 나오는 그 수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이. 윌리엄도 부분적이나마 그 가설에 동의했다. 물론 이렇다 할 근거 없이 추론한 가설과 예측일 뿐이었고, 의학적 소견이 전무한 란씽은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쯤 되면 정말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지금 몸 상태라, 여러 번 오가야 하는 이런 검사 정도는 생략해도 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닉 맥플러리의 미소가, 윌리엄의 치켜뜬 눈이 조금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실 란씽은 언제 불 뿜을지 모르는 루시의 총구보다 이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차라리 일을 그만 두고 하고 싶은 거나 하며 지내는 게 낫지 않겠냐 말한 적이 있다. 어차피 말세로 치닫는 세상에 내일이 불투명한 몸이라면 원 없이 사는 게 좋지 않느냐고. 일리 있다. 란씽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낫다고도 여긴다. 란씽은 아직, 루시가 처음 저를 스카우트 하러 온 날을 기억한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제가 구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과 어떻게든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간간이 자맥질하는 것들 역시.
……란씽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어중간하게 들뜬 시간대였다. 인트라넷과 전화 주소록을 번갈아 훑던 란씽이 자판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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